‘취하지 말라!’[동아광장/최인아]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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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새 사라지는 환호와 영광의 순간
승승장구에 취하면 보이지 않는 ‘내리막길’
담금질하는 자세가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내가 일했던 광고회사는 한 해에만 수백 편의 광고 캠페인을 만들었다. 한국 넘버원 회사에,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우리가 만드는 모든 캠페인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고 사랑 받는 건 아니었다. 어느 회사나 시장을 흔드는 괜찮은 캠페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니 성공 캠페인을 연달아 터뜨린 이는 우쭐해한다. 주변에서도 잘한다 추켜세우고 다음 프로젝트도 잘 부탁한다고 웃음을 흘린다. 이런 일을 겪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대가가 된 듯 목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승승장구의 시간이 길어지고 주위의 환호가 뜨거울수록 ‘자뻑’의 정도는 한층 심해진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우리의 목표는 잘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도록 잘하는 것이다. 기업들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듯 개인들도 오래도록 잘해야 좋은 기회를 계속 가질 수 있다. 문제는 한 번 잘한 것을 앞으로도 잘할 거라 오해하는 거다. 한두 번의 성공에 긴장을 풀고 마음을 놓아 버리거나 일찍부터 대가연(大家然)하는 사람은 오래도록 잘하기 힘들다. 이유가 뭘까? 성공에 취하고 자신에게 취하는 거다. 나는 늘 잘할 것 같고 내가 하는 일은 늘 맞다고 여기는 것. 알코올이든 성공이든 한번 취하게 되면 분별력이 사라지고 판단력이 작동하지 않는다. 또 자신에게 취하고 이전의 성공에 눈이 멀면 노력도 고민도 줄어든다. 이만하면 됐지 하며 쉬이 타협하므로 예전처럼 좋은 게 나오지 않는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지 못하고 일을 그르친다. 이런 건 옆 사람이 먼저 알아차리는 법이라 결국은 돌아서며 환호를 거둔다. 더는 찾아지지 않고 잊혀진다. 자신을 벼리지 않거나 가야 할 길을 놔두고 옆길로 빠지는 사람의 운명은 이런 거다. 삼십 년 넘은 사회생활 동안 숱하게 목격한 장면이다.

소금, 꿀, 목재를 태울 때 나오는 연기…. 이들의 공통점은 방부제(防腐劑)다. 음식을 저장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이들은 천연 방부제로 활용되었다. 소금에 절이거나 꿀에 재고 혹은 연기를 쐬게 해 오래도록 보관했다. 한데 방부제가 어디 음식에만 필요할까?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 방부제다. 조그만 성공에 취해 쉬 허물어지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자신을 엄정히 돌아보고 삼가는 것.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지 늘 점검하는 것. 이런 자세야말로 자신을 온전하게 지키는 방부제다. 소금 같은 방부제가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듯 자기 자신에게 방부제를 잘 작동시키면 자신을 담금질해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백세시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지만 당사자 개개인의 인생은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원로 소설가 한 분은 술 몇 잔 받아 마셨더니 칠십이 되었다고 했는데 나는 눈을 ‘꾸욱’ 감았다 뜨니 지금 나이에 이르렀다.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막 빠져나가는 것 같아 속상한데 심지어 이렇게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나이가 되면 내리막길이 떡하니 기다린다. 누구나 인생의 전반부는 올라가는 시간이다. 몸이 자라고 지식이 늘며 아이디어가 반짝반짝한다. 쌓이는 재미도 있다. 회사 생활도 어느 정도까지는 연차에 비례해 성과가 쌓이고 직급이 올라가며 연봉도 높아진다. 하지만 이런 시간은 계속되지 않는다. 어느 누가 계속 올라가기만 할까? 사장님들은 계속 올라갈까? 장관은 계속 올라갈까? 교수는 그럴까? 아니다. 누구라도 내려가는 길에 다다른다. 심지어 내려가는 길은 훨씬 가파르며 순식간에 끝이 난다.

조선 시대에 옷을 잘 짓기로 이름난 이가 있었다. 옷을 지으러 가면 딱 한 가지만 물었다고 한다. “과거 급제를 언제 했습니까?” 급제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선비라고 하면 앞섶을 길게 하고 오래되었다고 하면 뒷섶을 길게 했다. 왜 그랬을까? 이제 막 급제한 젊은 선비는 자신감 내지 자만심에 가득 차 어깨를 한껏 뒤로 젖힌 채 ‘이리 오너라’ 할 테니 앞자락이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앞 길이를 길게 했고, 급제한 지 오래되고 나이도 자신 양반은 허리가 앞으로 굽었을 뿐 아니라 겸손해졌을 테니 뒷자락이 올라갈 것을 예상해 뒤 길이를 길게 하는 것이다.

등산을 할 때 올라가다 넘어지면 손바닥이나 무릎을 조금 다치고 말지만 내려오는 길에 넘어지면 다리가 부러지거나 구르는 등 심각한 중상을 입기 쉽다. ‘취하지 말라!’ 짧은 이 문장, 오래전부터 새기고 있는 금언인데 어지러울 정도로 뉴스가 넘쳐 나는 요즘 큰일을 맡고 있거나 내려가는 길에 다다른 분들께 특히 전하고 싶다. 취하지 마시라. 한순간에 버려진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과대평가#취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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