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가 된 몸[이은화의 미술시간]〈133〉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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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크루거, 무제(당신의 몸은 전쟁터다), 1989년.
바버라 크루거, 무제(당신의 몸은 전쟁터다), 1989년.
낙태죄 폐지는 세계 정치계의 오래된 논제였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는 정치계, 여성계, 의료계, 종교계 모두 시각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6개월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첫 판결을 내린 후, 미국 내는 물론 많은 나라에서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를 위한 투쟁이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1989년 4월 9일 워싱턴에서 낙태법 철회를 위한 여성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미국의 개념미술가이자 페미니스트 미술가인 바버라 크루거는 이 시위를 위한 포스터를 제작해 현장 배포했다. 흑백의 여성 초상 사진 위에 굵은 글씨로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라는 문구를 쓴 강렬한 이미지의 포스터였다. 낙태 권리를 여성 당사자가 아닌,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 남성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작가의 절망과 분노를 담은 작품이었다. 원래 포스터에서는 ‘합법적 낙태 지지’ ‘출산 조절과 여성의 권리’라는 문구를 추가해 작품의 의도를 명확히 밝혔지만 대형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면서 핵심 문구만 남겼다. 해서 낙태 문제를 넘어 기성 예술과 남성 지배의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작품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사진 속 여성의 얼굴은 양쪽으로 분할돼 있다. 곱게 단장한 왼쪽 얼굴은 사회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여성상을 대변한다. 반면, 네거티브 필름처럼 반전시킨 오른쪽 얼굴은 불평등한 제도에 항거하는 여성의 상징이다. 작가는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성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정치의식을 가지고 투쟁하는 여성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바라보는 가부장적 사회의 관습과 함께 그런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영속화하는 미디어와 광고를 비판한다.

국내외에서 낙태법 논쟁이 다시 뜨겁다. 남성에 비해 여성은 외모로 평가되는 경우가 여전히 더 많다. 예뻐지기 위한 투쟁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30여 년 전 크루거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당신의 몸은 여전히 전쟁터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바버라 크루거#무제#당신의 몸은 전쟁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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