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문화를 제대로 바꿀 수 있는 재판[오늘과 내일/정원수]

정원수 사회부장 입력 2020-06-10 03:00수정 2020-06-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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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방해죄 입법 취지와 국민 눈높이 맞춰
10년 전 강기갑 1심 판결 논란 재연 말아야
정원수 사회부장
“의원 아닌 사람 자꾸 의원이라고 하지 마세요.”

20대 국회의원의 임기가 만료된 지 사흘 만인 이달 1일 서울남부지법의 형사법정. 선거법과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 통과를 위한 패스트트랙 지정을 저지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기소된 전직 야당 의원의 변호인이 ‘○○○ 의원’을 반복하자 재판장이 힐난하듯 이렇게 말했다. 4·15총선으로 기소 당시 현직 의원이던 27명 중 18명은 재판 도중 전직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재판부와 변호인의 신경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 2월 17일부터 이달 1일까지 세 차례 공판준비기일이 긴장감 속에서 진행됐다. 첫 기일에 변호인이 “총선 전까지 재판을 준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자 재판장이 “의원이라도 특권을 가질 순 없다”고 했다. 두 번째 기일에는 변호인이 “증거 영상을 분석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지만 재판장은 “공판준비기일이 피고인들의 재판 지연의 도구가 되어선 굉장히 곤란하다”고 비판했다.


한국 정치의 1번지 여의도를 관할하는 서울남부지법에선 요즘 판결의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말 그대로 ‘세기의 재판’이 열리고 있다. 재판 당일엔 검사 10여 명과 그 2∼3배의 변호사가 마스크를 쓴 채 법정을 가득 채운다. 규모는 작지만 약 10년 전에도 비슷한 재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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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상정에 반대하는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을 국회사무처가 강제로 해산하자 민노당 강기갑 전 의원이 국회 사무총장실을 찾아가 공중 부양을 하는 등 행패를 부린 사건이 있었다. 이듬해 1월 서울남부지법의 1심 단독 재판부는 “사무총장이 사무실에서 신문을 보는 행위는 공무라고 볼 수 없다”는 생경한 논리를 내세워 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으로 기소된 강 전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과 대법원이 300만 원 벌금형의 유죄로 뒤집었지만 대법원 확정 판결 약 한 달 전인 2011년 11월 22일에는 같은 당의 김선동 전 의원이 국회 회의장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강 전 의원의 10년 전 재판과 올해 패스트트랙 관련 재판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우선 단독재판부가 아닌 합의재판부가 재판을 맡았다. 형량만 놓고 보면 단독재판부에 맡겨도 되지만 국회법상 회의방해죄에 대한 판례가 없다는 이유 등으로 합의재판부에 사건이 배당됐다. 판사 1명이 재판을 하는 것보다는 3명이 모여서 숙의하다 보면 더 좋은 재판을 할 수 있다. 여당 의원들이 패스트트랙 충돌 당시 폭력 혐의로 기소된 사건도 다른 합의재판부가 재판을 하고 있다.

또 하나는 국회법이 완전히 달라졌다. 2012년 5월부터 시행된 국회법은 의장석을 점거하거나 회의를 방해하는 행위를 윤리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징계하도록 했다. 하지만 폭력국회 방지법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에 2013년 8월부터 회의방해 조항이 국회법에 추가됐다. 벌금 500만 원 이상이 선고되면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등 형사 처벌을 강력하게 하도록 한 것이다. ‘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입법 논의 때 있었지만 ‘국회가 다시는 폭력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상징적인 조치로 법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돼 현재까지 시행 중이다.

지난해 4월 패스트트랙 충돌 사태는 회의방해죄 기소 첫 사례를 불러왔다. 올 1월 검찰 기소 이후 6개월가량 공판준비기일만 열릴 뿐 첫 공판이 열리지 않고 있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지 국회 내에선 최후의 저항수단이 폭력이 아니라는 점이 법원 판결로 명확해졌으면 한다. 후진적인 정치 문화를 제대로 바꿀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법원의 재판은 투표만큼 중요하고, 강력하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패스트트랙#강기갑#정치 문화#국회의원#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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