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1차 패인, 현실 부정-인지부조화부터 치료해야[광화문에서/길진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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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진균 정치부 차장
길진균 정치부 차장
“에이, 설마….”

4·15총선 기간 동안 보수 진영 사람들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다. 각종 언론사 여론조사는 물론 정치권의 자체 분석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함께 절반이 넘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오면 조건반사적으로 이런 말이 나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많이 들었던 근거는 ‘여론조사를 믿을 수 없다’였다. 친문 성향 유권자가 ‘과대 표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래통합당의 한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여론조사를 할 때마다 여권 지지자들은 똘똘 뭉쳐 답변을 한다. 점잖은 노년층은 상대적으로 숨는다. 투표에서는 1인당 1표씩이니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요즘 여론조사는 젊은 층에게 익숙한 휴대전화 비율이 너무 높다.”

그래서 통합당이 제시한 대안은 노년층의 응답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질 가능성이 있는 유선전화를 조사 과정에 더 많이 섞는 것이었다. 이번 21대 총선부터 여론조사업계는 조사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안심번호’(특정 선거구에 사는지 확인된 사람들의 휴대전화번호)를 도입했지만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결국 통합당 여의도연구소의 여론조사는 유선전화 조사 비율이 30%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선거를 치러보면 실제 의석수는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 같은 현실 부정, 다시 말해 믿고 싶은 것만 보는 인지부조화 현상은 투표 당일까지 이어졌다. 곳곳에서 통합당의 폭망 가능성이 제시됐지만 통합당 내부에선 ‘투표율 65%’가 승패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투표율 65%가 넘으면 여론조사에서 잡히지 않은 샤이 보수가 대거 투표장으로 나온다는 뜻’이라는 설명이었다. 투표율은 66.2%로 65%를 넘었고,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보수 일각에선 투개표 조작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보수 스스로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라고 했던 이번 총선에서 통합당이 이런 패배를 당한 것은 이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병폐가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보수 당 앞에 놓인 현실은 과거와 달리 보수 진영이 정치 지형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4년 전 20대 총선까지 여론조사 시 응답자 비율은 보수 35%, 진보 25% 정도였지만, 3월 2일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진보 28.7%, 보수 26.1%였다. 중도는 36.5%였는데 그 중도층에서 민주당과 통합당의 지지가 37.3% 대 18.8%로 두 배 정도 차이가 났었다.

하지만 선거 기간 일부 극우 유튜버들은 ‘빅 마우스’가 되어 보수 진영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양 목소리를 높였고 결과적으로 진영 전반에 ‘정치적 마취제’로 작용했다. 그러다보니 보수의 합리적 인사들도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는 노력보단 ‘우린 할 수 있다’는 ‘정신 승리’ 모드에 빠져들었다. 황교안 전 대표는 물론이고 ‘혁신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당 공천관리위원회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보수 진영에선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백가쟁명식으로 쇄신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우선 보수진영의 ‘정치 시력’을 현실에 맞게 교정하지 않으면 다음 선거도 제대로 내다 볼 수 없을 것이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
#총선#보수#현실 부정#정신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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