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신연수]꽁꽁 숨는 5만 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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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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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조 달러’ 지폐가 국내에서 선물용으로 유행한 적이 있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서 2009년 발행돼 실제 사용했던 돈인데 국내 인터넷쇼핑몰에서 5000원에 팔렸다. 0이 무려 14개나 붙은 고액이었지만 짐바브웨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장바구니 한 개도 채우기 힘들었다. 당시 짐바브웨에서 달걀 한 개 값은 130억 달러였다.

▷짐바브웨와 비교할 순 없지만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 돈 계산을 어려워한다. 돈 단위가 크기 때문이다. 대기업이나 투자회사에서 외국 돈을 원화로 환산하려면 단위가 조(兆)를 넘어 경(京) 해(垓)까지 간다. 오래전부터 화폐 개혁(디노미네이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경제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다. 물가 상승을 감안해 5만 원권을 발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10여 년간의 논란 끝에 2009년에야 현실화됐다.

▷신사임당이 그려진 5만 원 지폐는 발행 4년 만에 ‘화폐의 여왕’ 자리를 차지했다. 작년 말 화폐 발행 잔액 54조3340억 원 가운데 5만 원권이 32조7660억 원으로 60%가 넘었다.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 가운데 5만 원권이 가장 많다는 뜻이다. 카드나 1만 원 지폐를 많이 쓰지, 5만 원 지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에게는 의아한 통계다. 궁금증을 풀어줄 단서가 나왔다. 그제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고액 재산가들이 5만 원권을 현금 다발로 인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피가 작은 5만 원권이 탈세 수단으로 쓰인다는 얘기다.

▷현장에서도 같은 말이 나온다. 정부가 세금을 더 걷으려고 돈의 흐름을 추적하니까 부자들이 은행 예금을 현금으로 찾아 감춘다고 한다. 백화점 매장에서는 5만 원권으로 12억∼15억 원 들어가는 금고가 한 달에 수십 개씩 팔린다. 예년에 비해 판매량이 20% 늘었다고 한다. 지난해 1만 원권과 5만 원권은 17조여 원씩 비슷하게 발행됐지만 5만 원권은 10조 원만 은행으로 환수됐다. 나머지는 개인과 기업이 갖고 있다는 뜻이다. 돈이 돌지 않고 금고 속에 숨는다니 우리 경제의 ‘돈맥 경화’가 걱정된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지폐#세금#5만 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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