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요즘 학생들 약골… 체력장 부활해 억지로라도 운동시켜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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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행 신임 대한체육회장

김정행 대한체육회 신임 회장은 애초 5일로 예정됐던 취임식을 며칠 미뤘다. 업무 파악이 먼저라는 판단에서였다. 김 회장은 6일 오전 내내 업무 보고를 받았고 산하 단체 회장 취임식에도 다녀왔다. 노조원들과 면담도 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그는 유도 선수 출신답게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열정적으로 인터뷰를 했다. 김 회장의 취임식은 8일 열린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김정행 대한체육회 신임 회장은 애초 5일로 예정됐던 취임식을 며칠 미뤘다. 업무 파악이 먼저라는 판단에서였다. 김 회장은 6일 오전 내내 업무 보고를 받았고 산하 단체 회장 취임식에도 다녀왔다. 노조원들과 면담도 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그는 유도 선수 출신답게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열정적으로 인터뷰를 했다. 김 회장의 취임식은 8일 열린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 김정행 신임 대한체육회장(70)의 좌우명은 초지일관이다. 좌우명처럼 처음에 세운 뜻을 이루기 위해 우직하게 실천했다. 한 우물만 팠다. 1958년 경북 포항 동지상고(현 동지고)에 다닐 때 유도에 입문한 이후 평생을 유도와 함께했다. 올해 1월에는 유도인 최고의 영예인 10단에 올랐다. 1961년 용인대(당시 대한유도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용인대맨’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유도가 그의 생활이었다면 용인대는 그 터전이었다. 1994년 용인대 제2대 총장에 선임된 이후 국내 4년제 대학 첫 5선 총장이 됐고, 1995년 대한유도회 회장에 취임한 뒤 6회 연속 회장 당선이라는 진기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체육 대통령’이라는 대한체육회장이 됐다. 두 차례 도전에서 좌절을 맛본 끝에 얻은 결과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처음 체육계 수장이 된 김 회장을 6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회관 집무실에서 만났다. 》

“당선됐을 때 너무 기뻤다. 체육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게 대한체육회장 아닌가. 그동안 29대 김종하 회장(핸드볼), 30대 김종렬 회장(럭비) 등 선배 경기인 출신이 체육회장을 한 적이 있지만 국가대표 출신으로는 내가 처음이다. 자부심을 느끼지만 그래서 부담도 크다. ‘경기인 출신이라 그런지 별로 능력이 없다’라는 평가라도 받는다면 후배들의 앞길을 막는 것 아닌가. ‘경기인 출신이라 더 낫더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다. 용인대 총장으로, 대한유도회 회장으로 오랫동안 일을 했다. 대한체육회 회장이 나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난달 22일 체육회장 선거에서 28표를 얻어 25표의 이에리사 새누리당 의원을 이겼다. 이날 참석한 대의원은 54명으로 한 표만 덜 얻었어도 과반이 안 돼 재투표를 해야 했을 정도로 박빙의 승부였다. 이 의원으로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선거였다. 치열했던 경쟁의 여파는 며칠 뒤 갈등 양상으로 표출됐다. 지난달 28일 대한체육회가 이 의원을 부회장으로 임명하는 등 새 집행부 구성을 마쳤다고 발표한 데 대해 이 의원이 “선거 이후 대한체육회나 김정행 회장 측에서 임원 선임과 관련해 어떤 제의도 없었다. 일과 시간 이후 일방적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비상식적인 행위”라며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리사 의원에 부회장직 끝까지 설득”

1967년 U대회서 은메달 딴 김회장 김정행 회장은 첫 국가대표 출신 대한체육회 수장이다. 196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은메달을 딴 뒤 시상대에 선 김 회장(왼쪽). 동아일보 DB
1967년 U대회서 은메달 딴 김회장 김정행 회장은 첫 국가대표 출신 대한체육회 수장이다. 196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은메달을 딴 뒤 시상대에 선 김 회장(왼쪽). 동아일보 DB
“이 의원은 내가 용인대 교수로 임용을 했고 태릉선수촌장으로도 적극 추천을 했던 사람이다. 용인대 기획실장을 맡길 정도로 아끼는 인재다. 선거 때 경쟁을 했지만 아끼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부회장 선임과 관련해서는 나도 당황했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선거가 끝난 후 이 이원이 한동안 전화를 안 받더라. 수차례 시도 끝에 간신히 통화가 돼 ‘우리 함께하자. 조만간 만나자’고 했더니 ‘건강 잘 챙기세요’라며 끊더라. 함께 일하는 데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여 부회장 명단에 넣은 것이다. 오늘도 직원을 보내 만나게 했다. 본인이 끝까지 거절하면 할 수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같이 일하자고 설득해 볼 작정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과는 함께 일하는 게 좋은 것 아닌가.”

그는 유도를 했던 사람답게 70세인 지금도 체격이 다부지다. 바짝 넘겨 올린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매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엿보인다. 좋은 말로 하면 그렇지만 달리 보면 고집 세고 무뚝뚝한 인상이다. 성격도 무서울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생긴 건 이렇지만 마음은 여리다(배석했던 직원이 ‘맞다’며 맞장구를 친다). 용인대에서 20년째 총장을 하면서 항상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불만의 목소리도 언제든 환영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판단하면 단호한 면도 있다.”

김 회장은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나 태권도와 럭비 등에 소질을 보였다. 하지만 그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유도 입문은 고교생이 된 뒤였다.

“동지상고 1학년 같은 반 친구 아버님이 문달식 초대 포항시장이었는데 그분이 유도 6단인 데다 이론적으로도 조예가 깊으셨다. 그분을 통해 유도의 매력에 푹 빠졌다. 유도는 호신(護身) 스포츠인 데다 예(禮)로 시작해 예로 끝나는 게 마음에 들었다. 동지상고에는 유도부가 없어 이듬해 유도 명문 대구 대건고로 전학까지 가 유도를 계속했고 졸업한 뒤에는 서울 소공동에 있던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에 입학했다. 유도학교에 간다고 하자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배도 갖고 있고 운수업도 하신 아버지는 6남매 중 유일한 아들인 내가 상대에 가기를 바라셨다. 그때 아버지 말씀을 따랐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대한유도학교는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유도가 지금보다 인기가 높았던 데다 졸업하면 취업도 쉬웠다. 경찰로 채용된 선배가 많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도 곧잘 했는데 유도에 빠져들면서 공부를 좀 게을리 한 것은 사실이다(웃음).”

유도를 하고 싶어 용인대를 택한 이후 그에게 용인대는 인생의 전부가 됐다. 1965년 조교로 출발한 그는 48년째 한곳에서 일하고 있다.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갔고 거의 모든 보직을 거쳤다. 1994년 첫 총장 취임 당시 3000명 정도였던 용인대는 그가 총장으로 일한 19년 동안 8000여 명 규모의 종합대학으로 발전했다.

1961년 용인대 입학 이후 좋아하는 유도를 계속 할 수 있었지만 대학 1학년 때만 해도 실력은 시원치 않았다. 입학 동기 50명 가운데 실력은 최하위권이었다. 선수 대부분이 초중학교 때 유도를 시작하는 데 비해 유도 입문이 늦었던 탓이다.

“엄청나게 노력을 했다. 남들 잘 때도 도복을 입고 훈련했다.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수석 졸업을 할 수 있었고 국가대표로 뽑힐 만큼 기량도 향상됐다. 조교를 하고 있던 1967년 8월 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에 나가 93kg급에서 은메달을 땄다. 지금은 한국 유도가 국제대회에 나가면 금메달을 몇 개씩 따오지만 당시만 해도 동메달 하나 건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문에 은메달을 땄다는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고향에서 카퍼레이드도 했다. 그때가 선수로서 내 전성기였는데 하필이면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유도가 정식 종목에서 빠졌다. 아마 올림픽에 나갔다면 색깔이 문제지 분명히 메달은 땄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국가대표 출신 첫 체육회장’을 넘어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 첫 체육회장’이 되지 않았을까(웃음).”

“재정 자립하고 이사회 정원 두배로”

김 회장은 한국 체육계의 우선 과제로 재정 자립을 내세웠다. 이사회 정원 확대와 스포츠교육센터 설립도 중요하다고 손꼽았다.

“제대로 된 체육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지금 같은 시스템에서는 훈련 지원 등 일상적인 사업 말고는 움직일 여지가 없다. 장기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려면 체육회가 집행할 수 있는 예산이 필요하다. 스포츠토토 기금의 50% 정도만 받을 수 있다면 진정한 스포츠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21명인 이사회 정원도 두 배쯤 늘리고 싶다. 여러 종목, 다양한 분야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이사가 더 많아야 한다. 혼자 판단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는 게 낫지 않나. 스포츠교육센터도 꼭 필요하다. 선수 폭행이나 심판 오심 문제 등은 스포츠교육 부재에서 비롯된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체육인들의 위상을 높이고 싶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김 회장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절정에 달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체력장을 꼭 부활시키고 싶다. 요즘 학생들 체격은 커도 체력은 되레 예전만 못하다. 만날 앉아서 공부만 하고 게임만 하고 휴대전화만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인성에도 문제가 생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체력장을 부활해 억지로라도 운동을 하게 해야 한다. 이제 한국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먹고사는 데 급급했던 시절은 지났다. 삶의 질이 중요한 때다.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은 건강해야 행복할 수 있다. 체력장 부활을 줄기차게 얘기할 것이다. 언론에서 많이 도와 달라. 나 혼자 떠들면 ‘저 사람 미쳤나’ 할 것 아닌가. 정부가 나서야 해결될 일이기 때문에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러 부지런히 뛰어 다니겠다.”

김 회장은 유도 선수 시절 ‘빗당겨치기의 달인’으로 통했다. 자신보다 체중이 30kg이나 더 나가는 거구들도 이 기술에 걸리면 한판으로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초지일관 유도라는 한 우물을 판 덕분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한국 체육 발전을 위해 초지일관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는 한국 체육 현안과의 싸움에서 시원한 한판승을 거둘 수 있을까.

○김정행 회장은

△생년월일=1943년 12월 7일(음력) △출신지=경북 포항 △호=월포(月浦) △체격=키 172cm, 몸무게 98kg △가족=부인 조명자 씨(62)와 딸 민성(34), 아들 충윤 씨(33) △학력=포항중-대구 대건고-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건국대 행정대학원 교육학 석사-일본 니혼대 이학박사 △주요 경력=1967년 도쿄 유니버시아드대회 유도 93kg급 은메달, 1976년 유도 대표팀 감독, 1986년 국제유도연맹(IJF) 국제심판 자격 취득, 1994년∼현재 용인대 총장, 1995∼2013년 2월 대한유도회 회장, 1998년 방콕 아시아경기 한국선수단 단장, 2002년 대한체육회 회장 직무대행, 2005년 4월∼2013년 2월 대한체육회 부회장, 2006년 5월∼2007년 5월 아시아유도연맹(JUA) 회장·IJF 부회장,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한국선수단 단장, 2009년 9월∼2011년 7월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위원, 2009년 10월∼현재 2014 인천 아시아경기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2011년 4월∼현재 IJF 집행이사 겸 마케팅위원장 △주량=소주 1병 △취미=음악 감상 △좌우명=초지일관

※인터뷰 게재에 따라 ‘한혜경의 100세 시대’ ‘이경석의 좌충우돌 육아일기’는 미룹니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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