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주 대전에서 출입기자들과 고별 오찬을 했다. 내각 후보자 명단이 발표된 직후여서 ‘성시경(성균관대·고시·경기고) 내각’이 화제에 올랐다. 한 기자가 3월부터 성균관대 행정학과 교수로 돌아가는 박 장관에게 성대의 학풍을 물었다. 그는 “한 번 실패를 맛본 분이 많고 해서 겸양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다”며 “대체로 온순하고 합리적인 분이 많다”고 말했다.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 나눠 대학 신입생을 선발하던 시절, 전기에 낙방하고 후기로 입학한 기자의 친구들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고시에 합격하거나 유학 가서 박사 학위는 딸 수 있겠지만, 각 분야의 최고위직에 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패배감에 지레 사로잡힌 친구가 많았다.
후기로 대학에 간 한 친구는 “승자 결승에는 나갈 수 없고, 패자부활전으로 떨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올림픽에서 유도나 레슬링 같은 일부 격투기 종목에는 탈락한 선수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패자부활전 제도가 있다. 하지만 금메달은 승자 결승에서 이긴 선수가 차지한다. 패자부활전의 최종 승자에겐 동메달이 주어진다. 대학에 떨어지면서 시상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20대 문턱에서 맛본 좌절은 한편으로는 이들이 더 성숙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 서울대 법대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해 성균관대 법대에 입학한 경기고 학생회장 출신의 황교안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사석에서 “만약 서울대에 바로 합격했더라면 교만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장관이 말한 성균관대 학풍과 맥이 닿는 부분이다.
박근혜 정부 초대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에 발탁된 후기대 출신은 황 후보자 외에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한국외국어대 영어과), 윤성규 환경부 장관 후보자(한양대 기계공학과) 등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기간 중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2군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을 방문해 “꿈을 이루는 게 어려워졌을 때 다시 기회를 갖도록 해 성공하도록 하는 것이 정치를 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젠다”라고 말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후기대 출신 인사들의 대거 발탁은 ‘패자 부활이 가능한 사회’를 강조해 온 그의 정치철학과 일정 부분 일치한다.
장차관을 못하고 공직을 떠났다가 발탁된 장관, 수석 내정자들 역시 패자 부활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현오석 부총리 후보자는 ‘출세 코스’인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장을 하고도 1급에서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곽상도 민정수석 내정자는 특별수사통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검찰의 꽃’인 검사장(차관급) 승진은 못했다.
여러 사람에게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줬지만 정작 박 대통령 본인의 앞길은 다르다. 5년의 시간이 지나면 평생을 ‘전직 대통령’으로 살아가야 할 뿐이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만회할 기회는 없다. 그의 ‘마지막 승부’가 오늘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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