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다시 읽는 안철수 출마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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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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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주필
배인준 주필
지난달 28일 서울 계성초교에서 빚어진 흉기난동의 한 피해학생 부모는 “묻지 마 범죄에는 사회적 책임도 있다고 본다. 이런 범죄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현명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쪽같은 자식이 당한 충격 앞에서 사건의 원인(遠因)까지 짚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돋보인다.

‘선의의 정책 경쟁’ 할 정책 있는가

하지만 보통 시민이 아닌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가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대통령은 어떤 대책의 필요성만 말하면 되는 사람이 아니다. 최종 책임자로서 성공할 정책을 제때 내놓고 실현해야 할 존재다.

지금 박·문·안 후보는 국리민복과 나라의 먼 장래까지 생각하는 정책 경쟁 대신 덕담 경연(競演)에, 방문(訪問) 문안(問安) 행보를 통한 이미지 경쟁에 치중하고 있다. 특히 보름 전 출마를 선언한 안 후보의 정책 부재가 두드러진다. 그는 9월 19일 출마선언에서 “나 자신보다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디고 희생하고 헌신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무너진 공교육을 바로 세우고, 학교폭력과 묻지 마 범죄로부터 지켜줘야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헌신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중요한 사회·교육정책의 ‘안철수판 대안’을 제시해 당당하게 검증받을 수 있어야 ‘준비’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안 후보 출마선언에 나오는 ‘미래 희망 변화 진심 선의(善意) 희생 헌신 통합 평화’ 같은 결 고운 말은 듣기 좋다. 그러나 박·문·안 중에 귀에 솔깃한 말을 더 많이 골라 쓰는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그 말대로 달콤한 세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안 후보는 청춘콘서트에서 ‘힘들지? 속상하지? 세상 불공평하지?’ 하는 위로(慰勞)마케팅으로 떴지만, 대통령이 난마처럼 얽힌 국정 난제들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위로의 수사학(修辭學) 이상이 필요하다. 해결 없는 위로에 오래 참을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즘 힐링(치유)이라는 말이 유행하지만 비용보다 효과가 클 구체적 정책수단 없이 민생을 힐링하겠다는 것은 요행 바라기 아니면 속임수다. 누구든 대통령 후보라면 2030의 일자리를 빼앗는 철밥통 노조, 새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는 서비스산업의 진입장벽과 규제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 해법을 내놓고 심판받아야 한다.

‘새 정치’ 이미지로 인기를 끌어올린 안 후보는 출마선언에서 “정치가 바뀌어야 우리 삶이 바뀐다”고 했다. 그러나 박 후보나 문 후보만큼도 정치개혁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안 후보의 ‘새 정치’는 과거만 부정했지, 손에 잡히는 정치쇄신 각론이 없다. 그는 “미래는 이미 와 있다”고 했지만 근거 부족한 낙관일 뿐이다. 정치쇄신 당위론 정도는 입사 시험 보는 대학생들도 줄줄 읊는다.

안 후보가 7월 19일 발간한 책 ‘안철수의 생각’만 봐서는 그가 ‘고민하고 결단한’ 정책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정책결정에는 국민합의가 중요하고, 소통을 잘해야 하며, 남북 간에는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막연한 원론일 뿐이다. ‘묻지 마 범죄에 현명한 사회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보통 시민의 생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단일화 조건 구체적으로 밝혀야

출마선언에서 안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성장동력과 결합하는 경제혁신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도 여러 과제들의 연관성을 말했을 뿐이지 정책은 아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어떤 경제주체들이 어떻게 역할을 분담하고 어떤 수단을 동원해 난제들을 풀어낼 것인지 액션플랜이 있어야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안 후보는 박 후보와 문 후보에게 “모두 한자리에 모여, 국민을 증인으로, 선의의 정책 경쟁을 할 것을 약속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런데 ‘선의의 경쟁을 할’ 정책이 가장 안 보이는 후보가 바로 그다. 선의의 정책 경쟁을 위한 회동이 본인의 정책 제시보다 급하거나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낡은 정치 기교로는 신인의 신선함마저 잃기 쉽다.

안 후보는 출마선언 후 야권후보 단일화에 대한 기자 질문에 “정치권의 진정한 변화와 혁신, 국민의 동의라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지지 못한 상황에서 논의하기는 부적절하다”고 했다. 그가 구태정치 청산을 진정 꿈꾼다면 그렇게 막연하게만 운을 뗄 것이 아니라, 어느 정당의 어떤 점이 어느 수준까지 변해야 단일화 논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주문을 분명하게 해야 옳다. 선거 막판까지 애매한 태도로 국민의 판단을 어지럽힌다면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안철수 현상’에 대한 안철수의 배신으로 역사에 남을지도 모른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안 후보는 대선이 70여 일 앞으로 다가온 이제라도 제대로 된 정책 경쟁에 나서기 바란다. 국가지도자가 되겠다면 남다른 통찰과 성찰의 결과를 국민 앞에 내놓고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안철수#단일화#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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