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택]서울 마포의 두 대통령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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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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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택 논설위원
권순택 논설위원
지난 일요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주차장에는 35대의 주차공간에 15대의 차량만 서 있었다. 지하철역이나 지하도에서 흔히 보는 에스컬레이터도 없어 도로에서 54개 계단을 걸어 올라갔더니 전시실은 붐비지 않았다. 그래도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주말 방문객이 1000명 이상이고 지난달 21일 개관 이후 17일 만에 전국에서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왔다”면서 “출발이 좋다”고 말했다.

박정희 기념관은 서울 북서부 상암지구의 요지에 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이 1km 떨어진 곳에 있고 기념관 바로 오른쪽에 연간 1000만 명이 방문하는 82만여 ㎡(25만 평) 규모의 월드컵공원도 있다. 바로 앞에는 133층 규모의 서울DMC랜드마크 빌딩이 들어설 예정이다. 처음 기념관 위치가 정해졌을 때 서울의 외진 곳인데다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라며 불만이 많았던 기념사업회도 지금은 만족하고 있다. 기념관 건립이 진행된 13년 동안 주변 환경이 많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념관에는 1961년 5·16부터 1979년 10·26까지 ‘박정희 시대 18년 6개월의 역사’가 3개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박정희 개인보다 1960, 70년대 대한민국의 성과와 업적을 중심으로 전시가 이뤄져 박정희 시대의 국가 성공신화를 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1961년)에서 1676달러(1979년)로 약 20배, 수출은 4000만 달러(1961년)에서 150억 달러(1979년)로 무려 370배가 됐다. 그 기간은 오늘의 2040세대 좌파들한테서 ‘보수골통’이라고 공격받는 60대 이상 세대가 국내외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시대였다. 기념관 방문객의 80%가 60대 이상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9년 ‘역사적 화해’ 차원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에 재정 지원 의사를 밝힘으로써 시작됐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었다. 하지만 진보라고 자칭하는 좌파들은 지난달 21일 개관식 날 기념관에 몰려가 ‘독재미화 기념관’ ‘박정희는 친일과 독재의 아이콘’이라며 기념관을 폐쇄하라고 외쳤다. 40대 여성 동화작가는 최근 한 신문에 쓴 글에서 상암동으로 이사를 간 뒤 박정희 기념관이 근처에 있다는 걸 알고 “이사를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떤 시대나 명암(明暗)이 있기 마련이다. 박정희 시대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산업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사과한다”고 했는데, 그런 피해자가 적지 않다. 박정희 시대가 ‘산업화 성공 시대’이자 ‘독재시대’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는 선조 대대의 가난을 끊어낸 시대요, 이를 통해 민주화를 가능케 한 시대다. 박정희를 폄훼하면서 북한을 굶주림과 아사(餓死)의 지옥으로 만든 김일성 김정일을 우러르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바로 보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박정희 기념관을 보았다면 같은 마포구에 있어서 시내버스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동교동 김대중 대통령 기념관도 함께 볼만하다. 2003년 문을 연 김대중 기념관은 박정희 기념관과 비교하면 시대보다 개인의 역사에 무게가 실려 있다. 김대중 기념관은 요즘 주말에만 20∼30명이 찾아올 뿐 한산한 편이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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