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감정의 정치학

  • Array
  • 입력 2012년 1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우리 재판부가 법원과 국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법부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시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점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28년 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던 박모 씨는 작년 말 재심사건공판에서 재판장의 말에 눈물을 흘렸다. 오랜 세월 맺혀 있던 감정을 풀어준 것은 어쩌면 무죄선고보다 서울고법 최재형 부장판사의 그 사과와 인정(認定)이었는지 모른다.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바친다는 말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엔 그 뒤에 ‘여자는 자기를 예뻐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는 말이 붙어 있어 좀 거북해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가장 원하는 건 ‘나를 알아 달라’는 것이라고 본다.

있는 그대로의 ‘나’는 아닐 수 있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를 알아봐주는 게 중요하다. 현실 그 자체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건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다. 갈등의 주요인도 여기서 나온다. 따라서 나를 몰라줘 생긴 문제 자체는 해결 안 되더라도 감정만은 풀어주는 신원(伸원)을 거쳐야 다음 단계로 발전이 가능하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로 인한 글로벌 분노의 2011년을 겪으면서 감정의 중요성이 재발견되고 있다. 우리야 2008년 쇠고기 촛불집회 때 이미 겪어봤지만 사실과 이에 근거한 이성적 판단은 무력했다. 공포와 루머, 감정에서 생겨난 근거 없는 인식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석이코노미스트 올리비에 블랑샤르는 “2011년에 나타난 묵직한 진실은 인식이 현실을 규정한다는 것”이라며 경기가 더 악화된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마음 얻는 능력 있어야 성공한다

사실보도를 생명으로 배운 기자로선 기막힐 일이지만, 뇌신경학이나 진화심리학 행동주의경제학 같은 첨단학문이 새롭게 밝혀낸 것은 ‘이성보다 감정이, 의식보다 무의식이 더 강하다’는 연구 결과다. 그래서 나는 새해에 세 가지 결심을 했다.

첫째는 남의 감정에 신경을 쓰겠다는 점이다. 미국 와튼 스쿨에서 ‘협상’을 강의하는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는 “사람이란 본래 자기 말에 귀 기울여주고 가치를 인정해주고 의견을 물어주는 사람에게 보답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협상이든 정치든 사업이든, 사람 사는 세상에선 다 비슷한 것 같다. 심지어 동물세계도 다르지 않다. 한 영장류 동물학자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문제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래서 ‘정치적 동물’인 인간은 물론이고 진짜 동물들도 정치를 한다. 정치란 무엇인가를 따지자면 너무 복잡하고, ‘정치적’이라는 단어의 음습하고도 야합적인 느낌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내 편을 만들어 나의 목표를 이루는 일이 결국 정치다. 나의 두 번째 결심이 바로 정치를 사랑하는 애정녀(愛政女)가 되겠다는 거다.

고독한 늑대나 독불장군은 픽션에서나 매력적이지, 실제론 무리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루저에 불과하다. 으르든 달래든 동맹과 네트워크를 키워 결정적인 순간 큰 힘을 내는 쪽이 성공한다. 특히 일대일 공격이 없는 동물세계에선 평소 내 편을 많이 만들어둔 쪽이 이긴다.

다행스럽게도 인간세상의 정치 성공은 힘보다 마음을 얻어내서 궁극적으론 국리민복을 이루는 데 달려 있다. 미국이 이라크전쟁에서 후세인 정권을 진작 무너뜨리고도 명쾌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이유도 이라크 사람들의 마음을 못 얻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여는 첫 번째 단추가 소통이다. 지금 우리 국민이 가장 원하는 차기 대통령의 자질도 소통이 꼽힌다. 단 여기서 소통이란 대화를 주고받는 게 아니다. 내 감정을 안다는 공감을 보여주고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고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우는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까지는 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그 약속을 깨서 신뢰가 무너지면 다음번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건 물론이다.

‘선수끼리 국민 속이는 일’ 없어야

이렇게 중요한 정치를 우리는 배울 기회가 없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에서 2015년부터 언어와 테크놀로지 같은 지적 도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능력, 자율적으로 행동할 줄 아는 능력과 함께 ‘이질적 집단에서 공감하고 협조함으로써 갈등을 풀어내는 상호작용 능력’을 평가한다. 21세기 지식정보화 시대가 요구하는 유능함에 정치적 문제해결 능력이 포함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정치를 좋아하게 만드는 ‘애정(愛政)교육’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셋째 그러나 정치를, 특히 선거를 ‘선수끼리 국민 속이는 일’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또 속지는 않겠다. 선거의 해, 모두가 내 편이라 우겨도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주고 싶은지를 기준 삼으면 어느 편에 마음을 줄지 판단할 수 있다. 그러자면 내 감정은 절제해야 한다. 잘될지 걱정이지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