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갈림길의 박근혜 대세론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19일 20시 00분


정연욱 논설위원
정연욱 논설위원
2004년 3월 박근혜 신임 한나라당 대표는 취임하자마자 당장 중앙당사의 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탄핵과 ‘차떼기당’ 역풍으로 얼룩진 ‘한나라당’과 절연하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17대 총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 “총선을 치르려면 제대로 된 당사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반대 의견이 쏟아졌지만 박 대표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급하게 구한 게 천막당사였다. 급한 대로 회의실, 기자실 정도만 만들다 보니 화장실도 없어 박 대표가 인근 건물의 화장실을 빌려 쓰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천막당사는 뉴 한나라당의 상징이 됐다.

당시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원내1당은 고사하고 의석수가 겨우 60∼70석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3월 30일 밤 20분간 TV로 방영된 선거방송연설 도중 박 대표가 한 표를 호소하며 흘린 눈물은 판세를 뒤집는 중요한 계기였다. 한 당직자는 “유세 현장도 아닌 방송연설에서 박 대표의 눈물을 보고 상당히 당황했다”고 회고했다.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21석을 확보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4년 ‘박근혜 현상’은 국민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정치권의 상식과 통념을 깬 박 전 대표의 행보에 국민들은 감동했다. 박근혜 현상은 지금의 ‘박근혜 대세론’을 만들어낸 동력이 됐다.

최근 휘몰아친 안철수 돌풍이 앞으로 찻잔 속 태풍에 그칠지 예단할 순 없지만 3년 넘게 지속된 박근혜 대세론은 분명히 휘청거렸다. 친박(親朴) 진영은 “그래도 박근혜 지지층은 견고하다”고 항변하지만 대선 승리는 지지층만으로 달성할 수 없다. 지지층을 뛰어넘는 플러스알파가 절실한 것은 선거의 ABC다.

안철수 돌풍은 박근혜 대세론의 이면에 가려졌던 박근혜 피로 현상의 속살을 드러냈다. 박 전 대표가 뒤늦게 현장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나선 것이나 5촌인 가수 조카 은지원 씨와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띄운 것은 이런 가능성을 적극 차단하려는 조치다.

국민 여론의 지지를 업은 대세론은 민심의 눈높이에 맞춰 지속적인 쇄신의 노력이 이어져야 생명력을 발휘한다. 현재 한나라당 내 주류 친이(親李) 진영이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주류로 떠오른 친박 진영은 쇄신보다는 스스로 울타리를 치는 데 급급했다는 비판을 받을 만 하다.

‘원조 친박’인 김용갑 전 의원은 최근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관련해 “박 전 대표의 평소 생각은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라면서도 “보수 대 좌파 세력이 맞서서 죽기 살기로 싸움을 하는 전쟁터에서 한 번 도와달라고 아우성치는데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너무 야속한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박 전 대표는 2004년 천막당사 시절 펼쳤던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행보를 다시 보여야 할 때다. 더 이상 “당 지도부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손을 내젓는 일은 없어야 한다. 뭔가를 계산하는 듯한 모습은 진정한 박근혜 리더십이 아니다.

동교동계 핵심인사 7명은 1997년 15대 대선 직전 김대중(DJ) 후보의 측근 정치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임명직에 나서지 않겠다’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친박 핵심 인사들에게 이처럼 호쾌한 장면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국민들은 거창한 구호보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대세론은 독이 아니지만 거기에 안주하면 독이 된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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