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이명박에 대해 찬반이 엇갈리겠지만, 그의 인생 역정이 범상하지 않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미국 현지 출판사는 “가난한 학생이 CEO와 시장을 거쳐 대통령에까지 오른 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싶어 하는 미국인이 많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미국 내 지한파들 사이에서 이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관심은 서울에서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높다. 노무현 정권이 불필요한 말들로 한미관계에 생채기를 남긴 데 대한 반작용인지, 요즘엔 미국이 짝사랑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차에 나오는 대통령 자서전이기에 반가웠다. 그런데 영문 번역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니 청와대 공식통역관인 K 행정관이라고 한다. K 행정관은 외교통상부 출신 직업외교관이다. 대통령부속실의 여성 행정관 1명도 번역을 도왔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보니 ‘자서전 출간은 대통령 공식 직무가 아닌 개인의 일인데…’ 하는 석연찮은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세금으로 녹을 받는 공무원이 개인 자서전 번역을 하는 게 적절할까.
청와대에 문의하니 “통역관이 밤에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아르바이트인 셈인데 보수는 지급된 것일까. 다시 물으니 청와대는 “자원봉사여서 보수는 없었다”고 답했다.
존경하는 윗사람을 위해 퇴근 후에 잠을 쫓으면서 번역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런 행정관들의 순수한 마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평가와 별개로 청와대 측에 묻고 싶다. 정식으로 출판사에 번역을 맡기면 되지, 왜 사소한 일로 공사(公私) 구분이 모호하다는 의심을 살 상황을 자초했는지.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은 거대한 업적보다는 작은 에피소드들의 축적으로 생긴다. 됨됨이를 엿보게 해주는 사소한 스토리의 편린(片鱗)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젖어드는 것이다.
2009년 12월 당시 일본 최고 실세인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은 680명의 수행단을 이끌고 중국을 공식방문했다. 이어 개인 자격으로 서울에 올 때는 비서관과 경호원 1명씩만 남기고 수행원은 다 귀국시켰다. 한국 정부가 제공한 차량도 사양하고 인천공항에서 차를 렌트했다.
존 베이너 미 하원의장은 매주 자신의 지역구를 오갈 때 하원의장용 군용기 대신 민항기를 탄다.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 36년간 기차를 타고 델라웨어에서 워싱턴까지 왕복 250마일을 출퇴근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A 씨의 회고다. “평일 저녁에 미 고위직 부인들의 모임이 열렸다. 부부동반인데 현직 장관, 상원의원인 남편들이 다들 직접 운전해서 왔다. 퇴근 후 사적인 용무에 관용 기사를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사모님용 관용차를 별도로 구입하는 수준의 한국 일부 정치인과 저가항공사 티켓을 직접 끊어 부인과 단둘이 휴가를 떠난 영국 캐머런 총리를 대비시키는 그런 자의적 비교는 하고 싶지 않다. 우리나라에도 캐머런, 베이너 못지않게 공사 구분이 철저한 공복이 많다. 지금은 은퇴한 김모 대사는 모시고 사는 아버지가 관사의 사무용품을 쓰려고 하자 “국가 재산”이라며 냉정하게 뺏었다고 한다.
그런 공복들의 정점에 대통령이 있어야 한다. 월급을 불우이웃들에게 기부하고, 평생 모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 대통령이 자꾸 사소한 일로 공사 개념이 부족한 사람처럼 비친다면 그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