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13일 구축함인 문무대왕함이 진해 해군기지를 출항하고 있었다. 군악대 연주 속에 갑판 위에는 해군 장병 300여 명이 도열해 두 팔을 높이 흔들었다. 해군 특수전여단 수중파괴대(UDT) 30명도 함께 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한주호 준위(53)였다. 해적 퇴치를 위해 소말리아 해역으로 떠나는 청해(淸海)부대 제1진이었다. 부두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당시 정옥근 해군참모총장, 장병들의 가족 등 1000여 명이 늘어서서 박수로 무운(武運)을 빌었다.
그날 이 대통령은 태극기 마크가 선명한 검정 가죽점퍼에 군청색 해군 모자 차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대통령은 한 준위가 천안함 구조를 위해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던 그제도 같은 복장으로 구조현장을 방문했다.
국가의 부름에 늘 앞장선 참군인
한 준위는 국가의 부름이 있을 때는 가장 먼저 자진해서 위험 현장을 찾는 군인이었다. 청해부대에서도, 이번 구조현장에서도 최고령 큰형님이었다. 천안함 구조에 나선 UDT 요원은 지휘관(중령)을 포함한 전원이 그의 제자다. 20년간 교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기른 특전대원은 2000여 명이다. 굳이 그가 가지 않아도 될 자리였다. 후배들의 만류에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뿌리쳤다. 늘 그런 식이었다. 35년간 편히 지내기를 거부한 군인이었다.
청해부대 파병을 앞두고는 현지 상황에 맞는 장비를 갖추고 훈련을 하느라 바빴다. 해적선에 오를 수 있는 특수 사다리를 선박 높이별로 만드는가 하면 평상시의 고정 표적이 아닌 이동 표적을 대상으로 사격훈련을 했다. 1993년 10월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때도 어김없이 구조현장에 있었다. UDT 요원들을 이끌고 시신 184구를 물 밖으로 꺼내는 데 앞장섰다. 전체 시신 292구의 3분의 2를 그의 팀이 수습했다. 한 구 한 구를 인양할 때마다 자기 가족처럼 조심조심 다루던 것을 후배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2년 후배로 33년간 한 준위와 함께 동고동락한 김종훈 원사(51)는 “한 준위는 군복을 성스럽게 생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늘 스포츠형 머리부터 군화까지 단정한 복장과 용모를 유지했다. 복장과 군기(軍紀)가 불량한 병사들을 보면 “군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다. 어디서든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호되게 나무랐다. 누구도 깨지 못한 UDT 교관 20년 경력은 엄격한 그의 성품을 반영한다. 한 준위는 UDT 대원들의 빨간 모자를 유난히 사랑하며 세계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따뜻했다. 후배를 따끔하게 나무란 뒤에는 사무실로 따로 불러 차를 따라주며 “미워서 그런 게 아니야”라고 다독거리는 자상한 형님이었다. 동료들의 길흉사(吉凶事)에는 아이의 돌잔치까지 빠지는 일이 없었다. 후배들에게 늘 “가족과 친구, 친지들도 생각하면서 군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집에서는 다정하고 자상한 남편, 아버지였다. 동료들과 술자리를 같이한 뒤 귀가하면 부인과 한잔 더 하면서 ‘군인의 길’을 얘기했다. 한식 및 일식 조리사 자격증까지 따서 아내의 요리를 거든 자상한 남편이었다.
죽어서도 군인이고 싶었던 영웅
그는 전역 2년여를 남겨두고 바다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해군이고 싶었으면 그렇게 갔을까. 서둘러 가면서 유언도 한마디 남기지 않았다. 천안함 침몰 다음 날 부인도 못 본 채 백령도로 황급히 떠난 뒤, 숨지기 전날 “바쁘니까 내일 전화할게”라고 한 것이 마지막이다. 아들 한상기 육군중위(25)도 같은 날 구조활동을 마친 아버지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힘들고 춥더라’고 하시기에 ‘이제 그만하시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래도 계속하겠다’고 하셨다”며 눈물을 쏟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너무나 가슴 아프다. 안 해도 되는 일에 앞장선 군인정신을 높이 기려야 한다”는 애독자들의 전화가 쇄도했다. 남이 알아주건 말건 묵묵히 군인의 외길을 걸어온 고(故) 한주호 준위, 그는 진정한 호국의 영웅으로 길이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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