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동정민]총 맞고도 한가했던 ‘위기대응 매뉴얼’

  • 입력 2008년 10월 3일 02시 58분


7월 금강산 관광에 나섰던 박왕자 씨가 북한 초병이 쏜 총에 맞아 숨졌을 때 남북 관광사업을 맡고 있는 한국관광공사는 당시 금강산지부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다. 이어 바로 ‘남북관광사업 위기대응 매뉴얼’에 따라 대응했다.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이 2일 공사로부터 확인한 공사의 위기대응 매뉴얼에 따르면 대응 절차는 5단계로 짜여 있다. ‘모니터링→인지→준비→대응→정상화/평가’로 돼 있는데 이 중 모니터링, 인지, 준비 단계의 경우 매뉴얼에 아무런 지침이 없다. 위기 발생 전 대처에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인 것이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5월과 6월에 관광객이 군사금지구역에 들어갔다가 북한 초병에게 붙잡혀 억류된 일이 있었다. 매뉴얼을 정교하게 만들었더라면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공사가 사건 발생 후 매뉴얼에 따라 매긴 위기등급은 4단계 중 가장 위험도가 낮은 ‘관심’ 단계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관심’ 단계는 정기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한 정도의 낮은 등급이다.

문제는 심각도와 발생도를 곱해 등급을 매기게 돼 있는 위기평가 측정 방법에 있다.

공사는 심각도에서 박 씨 사망으로 관광객이 30% 이상 감소할 것으로 보고 가장 높은 5점을 줬다. 하지만 금강산관광 사업이 시작된 후 총격 사망자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앞으로 발생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발생도 점수에선 가장 낮은 1점을 부여했다.

심각도와 발생도를 곱한 결과 이 사건은 5점에 해당됐다. ‘관심’(6점 이하), ‘주의’(10점 이하), ‘경계’(15점 이하), ‘심각’(25점 이하) 중 가장 낮은 ‘관심’ 등급을 받은 것이다.

공사는 심각도와 발생도 중 한 항목이 5점을 받으면 위기 등급을 올릴 수 있다며 ‘경계’ 등급을 발동하고 비상대책본부를 꾸렸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국민이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라면 가장 높은 ‘심각’ 등급을 매겼어야 했다. 이 경우엔 관광공사 사장이 주관하고 정부 부처가 참여하는 ‘위기관리대책위원회’를 즉각 가동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움직임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공사는 비상대책본부를 구성한 뒤에도 상부 보고를 ‘문화체육관광부’와 ‘통일부’ 중 어디에 해야 할지를 두고 갈팡질팡했다.

공공기관들은 국회에서 위기대응 매뉴얼을 공개하라고 할 때마다 국가 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았다. 이런 있으나마나 한 ‘위기대응 매뉴얼’이 드러날까 봐 비공개를 고집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동정민 정치부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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