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화제] '노나메기' 창간 백기완선생

  • 입력 2000년 3월 11일 10시 15분


백.기.완. 이땅의 민중 그 누군들 그 이름 석자를 모르랴. 아무렇게나 풀어제친듯한 갈기머리, 트레이드마크된 지 오랜 검정두루마기, 형형한 눈빛, 사자후처럼 당장이라도 포효할 것같은 걸걸한 목청. 기억하는가. 87년 대선때의 방송유세.

"국민여러분, 전두환이가요 안기부 지하에서 제 손톱밑에 바늘을 찔러넣었어요."

참으로 섬뜩할 이만큼 절절했던 민중후보 백기환의 피맺힌 호소.

연습 한번없이 20분인가를 NG 한번 안내 방송관계자들의 깜짝 놀랐다나.

그러나 마주해보면 사근사근하기가 한정없는 예순여덟의 자상한 할아버지. 고생고생한 딸래미가 이제사 대학교수가 되었다고 기꺼워하는 한 집안의 어른이기도 하다.

통일문제연구소 하나 꾸리기가 그리 버거워 기어이 문을 닫았다가 작년말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라는 책을 출판사상 처음으로 사전판매, 마련한 돈으로 다시 연구소 문을 열고야만 '의지와 오기의 진짜 사나이' 백기완. 땡전 한푼 없는 백선생이 이번에 또 일을 저질렀다. 잡지 '노나메기'창간이 바로 그것. 소시민에게까지 팽배해진 통일허무주의를 극복하고 해방통일의 참된 알짜를 빚어내는데 한줌 거름이 되자는 '거룩한' 뜻이다.

▼"노나메기는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

몇 년전 '노나메기'라는 동아리이름이 불온하다고 대학서 탄압을 받은 적도 있다는 노나메기가 무슨 뜻일까? 백기완님이 나직이 설명한대로 하면 "노나메기는 이를테면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이야" 그럴까? 노나메기란 같이 일하고 같이 잘 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우리 옛 정서를 이름하는데 딴은 그렇기도 하겠다. 노놔먹기(같이 나눠먹자)라는 뜻과 별 차이 없겠지. 뭣도 모르는 필자는 지레 짐작해본다.

사회주의가 뭐 별 것인가. 같이 일하고 같이 잘 사는게 사회주의 아닌감.

'희망의 시인' 박노해가 그리는 그런 세상.

다행히 오세철교수와 '어떤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가?' 댓거리(대담)기획이 있어 잡지의 무게를 한층 높여준다. 한국변혁의 참모습을 천착하는 김진균교수의 글도 값지다. 새뚝이 4명의 시도 새롭다. 함석헌선생의 '씨알의 소리'마냥 한 20년 줄기차게 펴내며 통일의 노둣돌이 되어야 할텐데.

대학로 옛다방 '학림'서 만나자는 약속대로 정시에 표표히 나타난 백기완님은 요즈음 당(糖) 때문에 술도 못드신다고 했다. 창간호 5천부를 찍었는데 한 5천부 더 찍어 다 팔려야만 2호를 찍을 수 있다는 현실적 걱정이 앞서는 그.

▼"자네 옛살라비는 어딘가?"▼

그 와중에도 넉넉한 유머와 우리말 사랑을 마구마구 펼친다. 옛살라비가 어디냐는 물음에 순간 당황, '아항, 고향말이지'. 60년대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마구 뚫어대는 터널이름을 청와대에까지 '판굴'이나 '맞뚫레'로 하자고 진정했다지. 땅불쑥하니(특히)라는 용어를 보면 낯설지만 한결 정겹다. 그의 책 곳곳에는 정겨운 우리말이 그득하다. 장가, 시집간다고 하지말고 '저치나라'간다고 하자는 그는 장산곶매이야기에서 민족의 웅자를 사정없이 읊어댄다. 건배의 우리말은 '아리아리 꽝'이란다. 한번씩 입에 올려보고 자꾸 써먹어보자. '아~리 아~리 꽝!' 레츠고(방송용어)는 '얼러라 꽝' 너무너무 재미있고 운치있지 아니한가.

노나메기 첫 페이지에 써주신 '큰붓에게'라는 칭호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감히 큰붓이라니? 모지랭이붓도 못되는 주제에. 백기완님의 젊은 친구들에 대한 애정은 유별나다. 주례를 '길눈이'라고 한다는데, 요즘 길눈이 한번 서 아주 곱상한 한복 일습을 선물받았다며 자랑이다. "너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곱네요" "허허, 그런가"

요즘같은 인터넷세상에 N세대라 일컫는 젊은세대들과 호흡하기가 어디 쉬운가. 그런데도 인터넷취재에 응하면서 '통일문제연구소' 사이트 링크 좀 시켜달랜다. "아무렴요. 걱정 붙들어매세요. 그런데 우리 기사보고 책이 불티나게 팔릴까요?"

영업부도 없는 출판사, 서점에도 뿌릴 여력이 없다. 전화나 우편으로 주문을 받는다. 매스컴 몇 곳에 책소개 실린 날 전화주문 5백여권. 그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갈텐데. 전화번호 02-762-0017, 02-743-8609. e메일:nkho@chollian.net nonameky@jinbo.net FAX 02-763-9854. 아무쪼록 재판도 찍고 2호 발행도 탄탄대로이어야 할텐데.

통일문제연구소 대문에 써갈기신 '물빛'이란 시귀가 눈에 밟힌다. 하루빨리 물빛처럼 투명한 사회가 되었으면… '오는 도둑처럼' 슬그머니 통일이 되어 백선생님의 1백세 넘은 늙은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으면…대문앞에 써붙인 민족문화대학도 하루빨리 세워졌으면…선생님의 방에서 혀를 굴린 둥글레차맛처럼 세상이 고소하기만 하다면…

최영록<동아닷컴 기자> yr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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