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지의 세상읽기]엉덩이 「횡포」

  • 입력 1997년 4월 26일 08시 16분


대체로 승객 한 명이 의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붐비지 않는 시간의 좌석버스. 버스에 올라서 보면 모두들 하나같이 창가 자리는 비워 놓고 통로 쪽에 앉아 있다. 보아하니 온전히 빈 의자는 없다. 어디에 앉을까 좌우를 보며 통로를 지나간다. 창가 좌석쪽에 가방이나 쇼핑백 등을 놓은 사람 옆에 앉겠다고 멈춰 섰다가 불현듯 물건을 치워 무릎에 놓는 사람의 씁쓸하고 분개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얼른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마침내 자리를 정하고 서면 나에게 선택(?)된 그 사람은 나를 힐끗 한번 보고 창가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앉은 채로 엉덩이만 60도 내지 80도 정도 돌려준다. 지나가라는 것이다. 별로 날씬하지 않은 아줌마가 높은 구두를 신고 커다란 가방까지 들고서 거기를 무사히 지나가는데는 엄청난 균형감각과 운동 신경이 요구된다. 대개는 버스의 덜컹거리는 리듬을 타고 창가 좌석쪽으로 고꾸라지거나, 때로는 본의 아니게 그의 어깨를 잡거나, 심한 경우 그의 무릎에 한번 앉게 되기도 한다. 그가 다음 정거장쯤에 내리기 때문이라면 이해가 전혀 안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경우에도 그가 통로쪽으로 일어나서 비켜주는 게 상식 아닐까. 내가 먼저 일어서 나가야 할 때는 또다시 아까의 실례를 반복해야 한다. 「나보다 일찍 내릴거면서 왜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니. 그냥 통로에 서 있지」하는 표정으로, 그는 다시 엉덩이를 이번에는 좀더 작은 각도로 돌려준다. 깨끗하고 조용한 지하철 5호선 안. 내 자리와 옆의 아가씨 사이에 조그만 틈새를 발견한 여덟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나를 한번 쳐다본다. 그러다가 내 옆의 아가씨를 또 잠깐 쳐다본다. 설마 「너희 둘 중의 하나가 일어나라」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그대로 앉아 있는데 그 아이가 몸을 획 1백80도 돌리고 엉덩이를 그 좁은 공간에 밀어넣고 앉는다. 둘레둘레 빈 좌석을 살피던 엄마가 아이를 보고 다가와 선다. 펄쩍 뛰며 어서 일어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딸의 순발력이 기특한지 뜻밖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아이는 앉은 채 엉덩이를 양쪽으로 흔들며 놀랍게도 『아이 좁아, 아이 좁아』한다. 못견딘 옆의 아가씨가 일어났다. 『엄마 여기 앉아』 내쪽으로 엉덩이를 더 밀어내며 그 어린 「효녀」가 외쳤다. 최연지〈방송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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