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다시 보자]<2>벽화로 본 고구려…(4)일부다처 상류사회

  • 입력 2004년 2월 9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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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교수
이태호교수
벽면 전체가 마치 연극무대 같다. 아래 난간에는 추상화된 먹선의 구름무늬 다섯 개가 날고, 장막 위로는 중앙과 좌우 기둥에 삼각형 붉은 불꽃무늬가 얹혀 있다.

연노랑과 갈색의 장막은 다섯 곳을 접어 올려, 두 가닥씩 넓은 끈을 늘어뜨려 놓은 모습이다. 차일은 위로 팽팽히 부풀어 있고 주름선은 굵다. 집안에 설치한 가설 장막이다.

○ 각저총 ‘대장군 전별도’ 상류생활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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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현의 5세기 벽화고분인 각저총(혹은 씨름무덤) 가운데 한 장면이다. 앞 칸을 지나 안 칸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만나는 후벽의 벽화이다.

큰 커튼 안쪽에 무대 중앙으로 주인공인 한 남성이 긴 의자에 앉아 있다. 그 오른편으로 평상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은 두 여인이 보인다. 이들 좌우에는 소년 시종과 소녀 시녀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다. 장막 밖 왼편에는 호위부관인 듯한 남자가 막 걸음을 떼는 자세이고 오른편에는 상을 든 시녀가 무대로 올라선다.

두 여인 뒤로는 소반에 크기가 다른 그릇이 세 개씩 놓여 있다. 가운데 남성의 왼편으로 세 다리의 소반에 손잡이가 달린 검은색 술병이 놓여 있다.

가랑이를 쫙 벌리고 두 손을 배꼽에 모은 중앙의 남자가 묘 주인이다. 네모 점 바둑판무늬의 바지에 붉은색 저고리를 입었는데 흉상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검은 띠의 저고리는 소매통이 좁고 어깨에 검은 가죽을 댄 전투복이다. 또 왼쪽 허리춤에 둥근 고리의 칼을 차고, 뒤쪽 소반에는 활과 화살이 놓여 있다.

왼쪽 벽의 씨름 그림과 함께 묘 주인이 무인(武人) 출신으로 대장군이었음을 암시한다. 벽화의 무대는 대장군이 출정하기 전 가족들과 작별하는 전별도(餞別圖)인 셈이다.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약간 굽힌 두 여인도 남편을 전장에 떠나보내며 안타까워 하는 자세다. 이별의 만찬치고는 검소한 상차림이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각저총 안 칸 뒷벽의 벽화. 묘 주인인 대장군이 출정하기 전 가족들과 작별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부인이 두 명(오른쪽에서 둘째, 셋째)이다. 그러나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고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이 벽화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여인이다. 묘 주인이 정부인과 첩을 둔, 고구려 상류사회의 일부다처(一夫多妻)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계에 따라 사람의 크기를 달리했던 당시의 화법(畵法)으로 볼 때 두 부인의 키가 같아서 눈길을 끈다. 집안에서 갖는 정부인과 첩의 위상이 별로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두 부인은 모두 머리를 땋아서 올려 묶고 삼각형의 흰 수건으로 감싼 모습이다. 정부인은 흰 주름치마에 붉은색 띠의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은 정숙한 차림새이다.

이에 비해 오른편의 첩은 화려한 편이다. 물방울무늬 두루마기의 붉은색과 검은색 두 줄 띠, 그리고 주름치마 끝단에 두른 이중의 띠 장식이 첩다운 복장이다. 이별을 슬퍼하는 표정은 정부인 쪽이 뚜렷하다. 묘 주인의 시선이 누구를 향해 있을지 그 얼굴을 살필 수 없어 아쉽다.

○ 처·첩 한자리에 나란히 앉아

부인을 셋 둔 경우도 있다. 평남 온천군 화도리의 수렵총(혹은 매산리 사신총이라고도 부름)의 북벽에서 찾을 수 있다. 수렵총은 사냥도를 비롯해 인물풍속도와 사신도가 공존하는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단실(單室) 구조의 벽화고분이다.

북벽에 북두칠성 아래 현무도와 나란히 묘 주인 부부상이 배열되어 있다. 간소하게 그려진 장방 안에 끝이 올라가고 목이 긴 가죽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평상에 올라앉은 네 인물이 보인다.

평남 온천군 화도리의 수렵총 안 칸 북벽에 그려진 벽화. 맨 오른쪽 부처같은 사람이 묘 주인인 남편이고 왼쪽에 나란히 앉은 세 여인이 모두 부인이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맨 오른쪽 검은색 포를 입고 부처처럼 앉아 있는 이가 묘 주인인 남편이다. 그 오른쪽 장막 밖으로 묘 주인이 타고 온, 앞발을 차고 오르는 말과 고삐를 쥔 마부가 대령해 있다. 묘주인의 왼쪽으로는 세 여인이 나란히 앉아 있다. 이들의 왼편 장막 밖에는 한 시녀가 대기하고 있다.

묘 주인 바로 옆의 정부인은 독립된 평상에 모셔지고 그 왼편의 두 여인은 한 평상에 나란히 자리한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첩들일 것이다. 정부인과 첩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세 여인은 크기가 엇비슷하다. 또 주황색 바탕에 먹점의 물방울무늬가 장식된 두루마기를 똑같이 입고 있다. 앞서 살펴본 각저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신분적 위치가 모두 대등했음을 보여준다.

각저총과 수렵총 외에는 인물풍속도 벽화고분이 대부분 일부일처의 부부 초상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태호 교수 명지대 미술사학과

▼고구려는 일부일처제…일부 상류층만 多妻▼

고구려는 일부일처(一夫一妻)제 사회였다. 그러면서도 각저총이나 수렵총 벽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부 상류층은 후궁이나 첩을 두었던 모양이다. 후사를 잇는 방편으로 용인되었으리라.

‘삼국사기’에 전하는 고구려왕들은 대체로 한 명의 왕후를 두었다. 물론 문자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28명 가운데 7명을 제외하고는 후궁을 둔 기록이 없다. 신라왕실이 근친혼을 통해 체제를 유지했던 데 비해 고구려왕은 인접 소국(小國)의 왕족이나 귀족층에서 왕비를 간택했다. 정략혼인 셈이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는 동아시아 제국을 탄탄하게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구려왕 가운데 후궁을 둔 유리왕 대무신왕 산상왕 동천왕 중천왕 등은 서민층에서 후궁을 구했다. 마음 편한 애첩으로 미색을 구하지 않았을까.

유리왕의 유명한 황조가(黃鳥歌)에 그런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후궁간의 다툼에 져서 궁전을 떠나버린 한족(漢族) 미인 치희(雉姬)를 못 잊어 망연자실 읊은 시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암수 서로 정답구나/외로운 이 내 몸은/뉘와 함께 돌아갈꼬(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시조인 동명왕 주몽에 이어 도읍을 옮기고 고구려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짐이 버거웠을 유리왕이다. 절박한 나랏일 못지않게 한 남정네로서 품은 그리움을 애절하게 노래했다. 이런 서정이 있었기에 고구려가 찬연한 벽화예술을 창조한 멋쟁이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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