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24시]내 자가용은 10량 전동차, 열쇠는 노인우대권

입력 2001-01-11 19:10수정 2009-09-2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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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게…. 조그만 승용차는 맘에 안 들어요. 지하철이 내 전용차지요.”

할머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지하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을 전용차를 타러 집을 나섰다.

매표소에서 차 열쇠(노인우대권)를 받아들고 한층 더 지하로 내려가니 육중한 전용차의 문이 스르르 열린다. 널찍한 좌석에 몸을 맡긴 할머니가 기자를 향해 씽긋 웃는다.

“어때요, 내 말이 맞죠?”

노년의 삶을 여유있게 가꿔나가는 이기옥(李箕玉·76·서울 종로구 명륜동) 할머니. 지하철이 그의 전용차가 된 것은 10년 전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편의 전용차도 더 이상 활용할 수 없게 됐다. 당시 할머니는 집 앞을 지나는 63―1번 버스노선도 잘 몰랐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니 겁부터 덜컥 났어요. 어느 날 굳게 마음먹고 지하철을 타보기로 했지요. 혜화역까지 7분이 걸렸는데 다리는 좀 아팠지만 생각보다 쉽더라고요.”

그 날 이후 할머니는 지하철에 쏙 빠졌다. 정확히 제 시간에 대령하는 데다 정체될 염려 없지, 걸을 수 있어 운동도 되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전엔 모르던 ‘삶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는 점.

“지하철을 처음 탈 때는 40, 50대 주부들이 떠드는 소리가 참 귀에 거슬렸어요. 아들이 대학에 갔다, 남편 회사가 어떻다 등…. 그런데 몇 년 지나니 그게 오히려 정겨워지데요. ‘참 소박하구나’ 했죠.”

할머니는 일주일에 적어도 5번 이상 지하철을 이용한다. 도봉구민회관으로 수채화를 배우러 가는 날 사흘, 정물화에 쓸 꽃을 사러 새벽 남대문시장에 가는 날 하루, 여의도에 볼일 보러 가는 날 하루.

“오전 6시에 4호선 회현역에 내려 꽃시장엘 가요. 싱싱한 꽃 한 단 산 뒤 다시 지하철을 타고선 그 향기를 맡아요. 아, 그 상쾌한 기분!”

그처럼 우대권을 받아 지하철을 이용하는 노인은 하루 10만명선. 가파른 계단과 꼬불꼬불한 환승로가 이들의 ‘적’이긴 하지만 노인이라고 승차를 거부하는 버스나 택시보다는 마음이 확실히 편하다.

이할머니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젊은이는 아직 보질 못했단다. 단지 1호선을 탈 때 노약자보호석에 앉았던 사람이 자리를 양보하면 왠지 미안해진다. 다른 노선보다 더 지쳐 보이는 승객들이 안쓰러운 걸까.

‘지하철 10년 사랑’에 쓴소리를 부탁했더니 주저하다 입을 뗀다. “안내표지가 노인들 보기에 너무 높은 데다 복잡해요. 붐비는 시간엔 그걸 쳐다보기는커녕 떠밀리기에도 바쁘거든요. 안내표지를 역 바닥에 붙여주면 더 좋을 텐데 말이죠.”

요즘은 경로우대증을 내보이기 전에 얼굴만 보고도 노인우대권을 줘서 좀 편하기도 하고 좀 서운하기도 하다는 이기옥 할머니. 그의 ‘지하철 연가(戀歌)’는 계속될까.

“그럼요. 지하철은 내 친구인걸요.”

<민동용기자>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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