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클린 21/부패고리 왜 안끊기나?]신뢰잃은 사정기관

입력 1999-06-09 19:57업데이트 2009-09-24 01:51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업보(業報)야. 업보.”

8일 오후 검사생활 20여년째인 K검사장의 긴 한숨 끝에 묻어 나온 말이다.

그는 요즘 신문 보기가 싫다. TV 켜기도 두렵다.

‘고급 옷 로비 의혹’사건에 이은 대검 공안부장의 ‘한국조폐공사 파업유도’발언 파문, 법무장관의 전격 경질 등 침통한 소식 뿐이다.

무엇보다도 K검사장을 가장 심란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뉴스와 함께 전해지는 검찰에 대한 국민의 강한 불신감이다.

“정말 큰 일이다. 검찰이 아무리 진실을 외쳐도 믿어주지 않을 분위기다.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검찰은 ‘죽은 목숨’이다.”

2일 ‘옷사건’ 수사발표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들은 10명 중 7,8명이 검찰을 못 믿고 있음을 보여줬다. 신뢰감을 나타낸 사람은 어느 조사에서도 15%를 넘지 못했다.

‘공익(公益)의 대표자이고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검찰청법 4조)로 사정(司正)의 중추인 검찰이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을 위기에 몰린 것이다.

또하나의 사정기관인 감사원의 현실과 문제점도 짚어 보았다.

▼법보다 로비가 위 ▼

올해 초 서울의 B변호사는 검찰에 구속된 한 피의자의 사건을 맡게 됐다. B변호사는 검찰청을 드나들며 열심히 변론했다. 그러나 검찰의 구속기소 방침은 확고했다. B변호사는 “재판이 시작되면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가족을 위로했다.

그로부터 며칠후. B변호사 사무실에 그 피의자가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찾아왔다. 깜짝 놀란 B변호사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친한 친구를 통해 검찰 윗선에 얘기를 했더니 기소유예로 풀어줬다. 재판을 안 받아도 된다”는 대답. B변호사는 심한 자괴감과 무기력함을 느꼈다.

헌법재판소가 문을 연 88년 9월부터 올해 5월말까지 ‘검찰의 불기소처분 때문에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며 낸 헌법소원은 무려 2308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에 대한 헌법소원 전체(3760건)의 61.4%에 달하는 수치다. 또 공무원의 직권남용죄 등에 대해 검찰이 기소하지 않을 경우 기소가능 여부를 판단해달라며 법원에 내는 재정신청도 94∼98년 5년간 1303건(연평균 261건)이나 접수됐다.

◆정치검찰의 ‘업보’◆

“한 두건의 정치적 사건 처리를 둘러싼 중립성 논란 때문에 일선 검사들의 노고로 쌓아 올린 국민의 신뢰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2월 서울지검 평검사들의 연판장 중에서)

80년대 후반 지금은 여당인 국민회의가 야당인 평민당이던 시절. 국회에서 여야간 몸싸움이 있었다. ‘폭력을 행사한 평민당의원을 수사하라’는 여권의 지시가 검찰에 떨어졌다. 젊은 검사들은 반대했다. “국회에서 일어난 사건은 수사가 아닌 정치로 푸는 게 맞다”는 이유 때문.

그러나 계속된 ‘외압’으로 수사는 시작됐다. 평민당 의원 등 몇 명이 기소됐다. 하지만 여야간의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없던 일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검사들은 또 반대했다. “기소를 한 이상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 하지만 검찰이 정치를 이길 수는 없었다.

10년이 흘러 지난해 12월31일 ‘국회본관 529호 사건’이 터졌다. 한나라당이 “529호에 안기부 사찰분실이 있다”며 농성을 벌이다 출입문을 부수고 강제 진입한 것. 검찰은 이 사건을 ‘불법 난입 및 기밀문서 탈취사건’으로 규정했다. 대검 강력부까지 나섰다. 그러나 이 사건도 여야간의 타협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검사들은 “법대로 야당을 수사하면 ‘야당탄압 검사’가 되고 반대로 여당을 수사하면 ‘감(感)을 못잡고 있는 검사’라고 불이익을 보는 게 현실이다”고 하소연한다.

그래서 검찰내부에서는 ‘검사는 피의자를 잘 만나야 출세한다’는 말도 나돈다.

◆인사는 만사(萬事)? 망사(亡事)!◆

인사에 대한 검사들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30대 초반의 한 검사는 “수사능력도 중요하지만 앞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빽’이나 ‘줄’은 그보다 더 중요한 실력이다. 한 마디로 무한경쟁이다”라고 털어 놓았다.

지방에 근무하는 검사들 중에는 훗날 ‘줄’이 될 선배검사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주말마다 상경하는 경우도 상당수라는 게 그의 귀띔.

검사생활 10년을 넘긴 중견검사 K씨는 “주요 지방검찰청의 부장검사급이 되면 ‘검찰의 별’인 검사장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본격적인 줄서기에 나선다”고 말했다.

‘국회 529호 사건’을 앞장서서 수사해 ‘정치성이 짙다’는 후배들의 원성을 샀던 L, C검사장은 이번 인사에서 노른자위 자리로 영전했다. 자민련 이의원의 수사를 중단했던 S검사장도 고검장으로 승진했다.

◆자기 종아리부터 쳐라 ◆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검찰이 사정의 중추기관으로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전신 마취 대수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수술이 시급한 부위는 인사제도.

참여연대는 검찰인사위원회에 시민단체 대표, 재야 법조인 등을 참여시켜 실질적인 의결기구로 격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단체와 야당이 내놓은 또하나의 특효처방이 특별검사제. 참여연대 등은 “부담스러운 정치사건을 특별검사에게 전담시키는 것이 검찰의 중립성 확보를 앞당긴다”고 주장한다.그러나 검찰과 여당은 ‘이미 미국에서도 실패한 제도’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

검찰 내부의 민주화를 막는 잘못된 관행으로 굳어져 버린 ‘검사동일체의 원칙’도 하루빨리 개선 또는 폐지돼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고려대 김일수(金日秀)특수법무대학원장은 “잘못된 원칙이 검사 개개인을 검찰조직의 기계부속품처럼 만들어버렸고 위계질서를 통한 정치적 압력과 부당한 로비의 전달통로로 변질됐다”고 말했다.

‘<`클린21’특별취재팀=오명철차장 이병기 이철희 박현진 윤종구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많이 본 뉴스
최신기사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