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에선]부패 누가 막을 것인가

  • 입력 1997년 4월 26일 20시 02분


「식량비(食糧費)」.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 얘기가 아니다. 일본에서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 식량비라는 예산항목을 놓고 지방자치단체와 시민그룹간에 2년 넘게 전면전이 벌어졌다. 먼저 결과부터 살펴보면 시민단체의 통쾌한 승리다. 대부분의 지자체들은 올해들어 식량비라는 항목을 아예 폐지하거나 그 규모를 엄청나게 삭감했으며 부정지출에 연루된 아키타(秋田)현 지사는 자리를 내놓기까지 했다. ▼ 「공무원 식대」 폐지 논란 ▼ 일본에서 식량비란 원래 1945년 패전후 배고팠던 시절 공무원이나 회사원들이 도시락 걱정없이 열심히 잔업을 할 수 있도록 편성한, 말하자면 식대 예산이었다. 그러나 일본사회가 풍족해지고 여유가 생김에 따라 이 예산은 당초 취지와는 다르게 용도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공공기관들은 주민들이 식량비가 당초 의도대로 식대로 사용되는지 여부를 모르는 사이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즐기는 비용으로 이 예산을 전용했다. 급기야 지자체들은 중앙부처를 상대로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벌이는 이른바 「관관(官官)접대」 로비자금으로 흥청망청 써댔으며 어떤 공무원들은 거짓말로 회식을 했다며 식량비 예산에서 돈을 타냈다. 식량비가 로비자금으로 둔갑해 쓰이거나 공무원들이 자기 호주머니를 불리는 돈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이에 제동을 걸고 나선 건 「전국 시민옴부즈맨 연락회의」 등 시민단체. 이들은 지난 95년 초부터 정보공개를 규정한 지자체조례를 근거로 식량비의 명세를 주민들 앞에 밝히도록 요구하고 주민감사청구에 들어갔다. 지자체들은 회식이나 모임 그 자체는 공개할 수 있으나 프라이버시 보호차원에서 참석자 명단이나 자세한 비용 명세를 내놓을 수 없다고 버텼다. 시민단체들은 지자체가 뭉뚱그려 제시한 회식비가 정확한지 음식점과 요정 호텔 등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확인대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제대로 맞아떨어질 리가 없었다. 시민단체들은 법적 대응에 나섰다. 도쿄 오사카 센다이법원 등은 잇따라 관련자료와 참석자들의 전면 공개 판결을 내렸다. 오사카 고등법원은 한 차원 높여 지자체의 식량비 허용범위는 「사회통념상 1인당 6천엔 정도」라는 기준을 제시했다. 하룻밤에 한 사람당 최고 6만엔까지 펑펑 써댄 공무원들은 「관관접대」는 필요악이라고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식량은 국가를 지탱하는 근본물의 하나로, 관료들에게 식료(食料)를 현물로 지급하던 고대부터 항상 말썽거리였던 것 같다. ▼ 시민이 직접 나서야 ▼ 일본의 나라(奈良)유적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중에는 왕실 직원이 식료로 청구한 문서에 「봉(封)한다」는 글자를 이중삼중으로 써넣어 식료를 부풀리지 못하도록 한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 일본에서는 시민단체들이 똘똘 뭉쳐 「시민입법기구」를 만들어 국정 레벨까지 직접 감시하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일본 권력의 통칭인 「가스미가세키(霞が關)」를 시장부문(경제) 지방부문(지자체) 정치부문으로 나눠 시민이 컨트롤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보관련 청문회와 검찰수사를 지켜보면서 시민들이 공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행정부를 철저히 견제하고 부정부패를 다스려야 할 검찰, 감시역할을 해야 하는 언론 등이 제 기능을 못했고 시민들도 아울러 그 책임을 못했다는 자책감이 절실히 느껴진다. 윤상삼 <동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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