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83>卷六. 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6월 14일 03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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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진평의 독수(毒手)가 불 지핀 의심과 분노로 앞뒤 없이 내닫던 패왕 항우도 범증이 떠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의심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으나, 옷깃을 자르며 헤어지듯 뒤 한번 돌아봄 없이 떠나가는 범증에게서 자신의 의심과는 거리가 먼 어떤 개결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부(亞父)의 일은 아무래도 알 수가 없구나. 의제(義帝)를 죽인 것 때문에 내게서 멀어졌다고 하나, 가만히 돌이켜 보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내가 경포와 형산왕, 임강왕에게 의제를 죽이라고 할 때, 그는 말릴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한번도 팔 걷고 나서 말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일년이 넘도록 나를 도와 꾀를 짜내고 일을 꾸며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무엇 때문에 독안에 든 쥐 꼴이 난 유방에게 붙는단 말인가. 또 유방에게 붙었다면 그토록 급하게 형양성을 치게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으로 밤새 뒤척이던 패왕은 날이 밝는 대로 중연(中涓) 하나를 보내 범증의 군막을 살펴보게 했다.

“아부께서는 이미 새벽에 길을 떠나셨습니다. 대왕께서 내리신 것은 모두 봉해 군막 안에 남겨두고 말 한 필에 시중드는 이졸 하나만을 데리고 팽성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돌아온 중연이 그렇게 보고 들은 대로 알려왔다. 그 말에 패왕은 다시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아이 같은 기분이 되었다. 이제라도 빠른 말로 뒤쫓게 해 범증을 데려오게 하고 싶었으나, 군왕의 체면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팽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장수들과 수령들에게 급한 전갈을 보내 아부께서 돌아가시는 길을 편안하게 보살펴 주라고 이르라.”

그런 명으로 범증을 향한 때늦은 미련을 달랬다.

범증이 그렇게 떠남으로써 패왕이 다른 장수들에게 품고 있던 의심의 불길도 차츰 잦아들었다. 대사마 주은을 내쫓듯 구강으로 보낸 뒤로 패왕은 어떤 장수도 벌주거나 내쫓지 않았다. 덕분에 불안하고 울적해 하던 종리매와 용저는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열흘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집극랑(執戟郞) 하나가 군막 안으로 달려 들어와 패왕에게 알렸다.

“범 아부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부를 모시고 팽성으로 떠났던 이졸이 돌아와 대왕께 뵙기를 청합니다.”

“뭐 ? 아부께서 돌아가셨다고?”

놀라 그렇게 소리친 패왕이 얼른 그 이졸을 불러들이게 해 물었다.

“아부께서는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느냐?”

“소성(蕭城) 못 미친 곳에서 등에 난 독창(毒瘡)이 터져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팽성에 이르지도 못했구나. 그렇다면 너는 아부의 유해라도 모시고 팽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떻게 돌아왔느냐?”

“돌아가시기 전날 밤 아부께서 제게 글을 남기시며 무슨 일이 있거든 지체 없이 대왕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돌아가셨으니… 유해는 소성의 수장(戍將)께서 맡아 팽성으로 운구하셨을 것입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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