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51>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1월 6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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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놀라지 말라. 철 이른 구풍(구風=태풍 같은 열대성 저기압의 총칭)에 지나지 않는다.”

“물러나지 말라. 물러나는 자는 목을 벤다!”

초나라 장수들이 칼을 빼들고 달아나는 군사들을 얼러댔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윽고 하늘까지 칠흑처럼 새까매지자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한 사졸들은 하나 둘 바람을 등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처음 놀라고 겁먹기는 한군도 마찬가지였다. 장졸을 가릴 것 없이 달아나던 발길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한왕 유방은 달랐다. 설령 그게 우연한 자연현상일지라도, 한왕은 하늘의 도움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큰바람이 불고 하늘이 어두워진 것이 그의 마지막 탄식이 있은 바로 다음에 일어난 일이라 더욱 그랬다.

“적은 바람을 등지고 동남쪽으로 물러가 서북쪽이 비어 있다. 그러나 서쪽은 수수가 막고 있으니, 모두 북쪽으로 길을 잡아라. 그러면 뒤쫓는 적이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나마 적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한왕이 그렇게 영을 내리고 스스로 앞장섰다. 짐작대로 길을 막아서는 초나라 군사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 덜 빠져나간 부대가 있어 그들과 부딪히게 되면 한군은 어쩔 수 없이 한바탕 싸움을 치러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북쪽으로 달리니 차차 바람은 걷히고 날도 밝아졌다. 초나라 군사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한왕이 말고삐를 당기며 뒤따라오고 기사(騎士) 하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소성(蕭城) 북쪽인 듯한데 고을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다급한 불구덩이는 빠져 나온 셈이었다. 한왕은 거기서 닫기를 멈추고 뒤따라오는 장졸을 모아보았다. 겨우 서른 기(騎) 남짓 되는데, 이번에는 노관마저 보이지 않았다.

“노관은 어디 갔느냐? 누구 노관을 보지 못했느냐?”

한왕이 새삼 그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좀 전의 기사가 머뭇거리다가 다시 대답했다.

“태위(太尉)께서는 옹치(雍齒)를 맞아 싸우러 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큰바람이 불고 어둠이 덮여 제대로 싸울 틈은 없었을 것입니다. 적과 뒤섞여 있다가 저희와 길이 엇갈린 듯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곁에 남아 있던 노관까지 보이지 않자 어지간한 한왕도 그냥 배겨내지 못했다. 떨어지듯 말에서 내리더니 굵게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탄식했다.

“과인이 달포 전 팽성에 들 때는 거느린 제후만 해도 다섯에 왕이 일곱이었다. 장수는 대장이 스물이요, 부장(副將) 아장(亞將) 비장(裨將)을 아우르면 부장(部將)만도 100을 넘었다. 군사 또한 우리 한군 20만에 병기와 대오를 갖춘 제후군도 30만이 넘어 많게는 56만 대군을 일컬었다. 그런데 어리석고 못난 과인을 만나 그 모든 제후 왕과 장수들은 생사를 알 수 없고 군사는 너희 수십 기만 남았다. 그들은 거의가 장수나 사졸이기 전에 과인의 오래된 벗들이었고, 같은 땅에서 나고 자라 서로 손발처럼 돕고 의지해 살던 이웃이었다. 천하가 무엇이기에 그들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냐. 그들의 목숨과 바쳐야만 얻을 수 있는 천하라면 내 바꾸지 않으리라. 바꾸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한참이나 때 아닌 감회에 젖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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