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90)

  • 입력 1999년 12월 6일 19시 44분


문이 열리면서 할머니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곱게 화장을 했고 어디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인지 검은 원피스의 정장을 하고 가슴엔 은빛 브로치에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하구 있더군요. 그네는 한 손에 큼직한 가죽 가방을 들고 왔어요. 갈색의 가죽에 노란 금속 장식이 붙은 아주 고풍의 보스턴백이었지요. 그런데 그 안에서 속옷가지들을 꺼내는 거예요. 나는 흥미있게 이 할머니를 힐끔거리며 지켜 보았지요. 할머니가 동전을 세탁기에 넣고 원형의 유리문을 열어 빨래를 쑤셔 넣더니 내 맞은편에 앉았어요. 나와 눈길이 마주치자 군탁, 하고 인사를 하더군요. 나도 고개를 까딱 해보였지요. 잠시 앉았던 할머니가 어깨를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하고나서 가방에서 작은 스텐 술병을 꺼냈어요. 좋게 말해서 애주가나 아니면 지독한 알콜 중독쟁이들이 늘 상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술병이랍니다. 싸구려 위스키나 브랜디를 그 모양 좋은 병에 따라서 지니고 다니잖아요. 그네는 병 뚜껑을 돌려 빼서는 거기다 술이 찰찰 넘치도록 붓고는 단숨에 털어 넣었어요. 할머니가 입맛을 다시고나서 나에게 술병을 쳐들어 보였습니다.

한 잔 하겠어요?

라고 그네가 말했겠죠. 나는 고개를 저을까 하다가 그네의 고독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손을 내밀며 당케, 하고 응락했어요. 그런데 술잔에 입을 대는 순간 꼬냑과 같은 독일 브랜디라는 걸 알았지요. 맛과 향이 아주 괜찮았어요. 내가 그네에게 물었죠.

한 잔 더해도 되겠습니까?

내 말이 전달이 되었는지 그네는 물론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고 나는 한 잔 더 따라서 마셨어요. 그네도 다시 한 잔.

나는 마리 클라인 부인이에요. 당신의 이웃에 살아요.

정말이에요? 나는 한입니다.

알고 있어요. 도어의 명패에서 봤지요.

그네가 나와 마주보고 있는 방에 살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할머니는 처음 이사 오던 날부터 나를 살펴보고 있었나 봐요.

우리 남편도 화가였다오. 지금은 죽고 없지만. 그는 동양을 좋아했어요. 내 방에는 그가 좋아하던 중국 도자기가 몇 점 있는데…원한다면 내가 나중에 보여 줄게요.

유학생 동료들이 이웃에 혼자 사는 노인들을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 적이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개 개나 고양이 한 마리와 살고 있었어요. 그것들과 식구 사이처럼 혼잣말로 끊임없이 대화하고 남의 일에 병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한번 말을 터 주면 이 일 저 일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면서 자꾸 일상으로 비집고 들어온다지요. 그러나 사실은 나도 누군가 이웃을 만들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거든요. 우리는 어떤 단어는 서로 알아듣지 못하고 영어 문장을 섞어 쓰기도 하면서 빨래가 다 끝날 때 쯤에는 그 술병을 다 비워 버렸어요. 내가 그네에게 먼저 말해버렸죠.

도자기 구경을 할 수 있을까요?

오, 그럼요.

우리는 오래된 사이처럼 빨래 뭉치를 옆에 끼고 우리 아파트로 갔어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나선형의 철제 계단을 올라 같은 층에서 오른쪽이 내 방이고 왼쪽이 클라인 부인의 방이었지요. 그네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서 불을 켰어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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