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37)

  • 입력 1999년 10월 5일 19시 37분


새로 지은 은행 건물 모퉁이에 아크릴 간판이 보여서 들어서니 미끄러운 대리석 계단은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겉과는 달리 안은 옛날식 그대로의 다방이어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마음은 놓였다. 오히려 어중간하게 멋을 부렸더라면 불편했을 텐데. 역시 복덕방 아저씨 같은 노인들 두엇뿐이고 실내는 턱없이 넓었다. 어항과 플라스틱 화초와 포도가 장식되어 있었고 아무도 보지 않는 텔레비전에서는 홍콩 무협영화가 비디오로 상영 중이었다. 나는 벽가에 있는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차를 시키고 나이 먹은 레지가 찻잔을 갖다 내려놓기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나서야 백에서 편지를 꺼냈다. 뭐라고 허튼 소리를 했는지 보아야겠어.

한형에게

아프다던 날 보고 올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첫머리를 읽다 말고 혼자 웃었다. 아주 고전적으로 나오시는구나. 아니 무엇보다도 편지를 남길 생각을 하다니 동경 유학생투가 아닌가. 우리 아버지도 근사하게 설익은 감 이야기나 하구 말던걸.

그러나 그날 아침까지 차편으로 지방에 물건을 넘겨 주어야 했기 때문에 화실로 찾아갈 수가 없었소. 며칠 동안 무리를 했으니 아마 몸살 감기가 들었겠지. 우리를 찾기 시작한 모양이오. 다른 사람들보다도 나는 아는 게 많아서 깊이 잠수해야 합니다. 전화는 가장 위험하니까 아예 걸지도 않을 생각이오. 또 내가 거기 자주 갔던 걸 아는 사람도 많으니까 앞으로 얼마 동안이 될지는 모르지만 못 만나게 되었어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오 선배를 존경합니다. 나 따위는 현우 형님과 비하면 아직도 배회하는 중간층에 지나지 않아요. 이제 겨우 지평선을 희미하게 발견했다고나 하겠지요. 나는 선배의 예쁜 딸을 한형과 더불어 키우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정희 씨가 아니라 박형에게서 들어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손발이 아주 잘 맞지 않았습니까. 어느 결에 우리는 동무가 되어 버렸던 겁니다. 나는 지금 진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진지한 거 지긋지긋하게 좋아하는구나. 나는 자네에게 아무런 느낌도 없었어. 자네가 더 잘 알잖아. 한데 이것만은 분명했다. 자네를 대할 적에 그 누구보다도 편안했다는 것. 오히려 오랍 동생 같았을 거야. 나도 자네의 순박한 기질을 좋아해. 안타깝게도 사람이나 자연이나 아무튼 아름다움이라든가 정서라든가 아니면 감수성이라든가 하는 따위에 대해서는 내가 산수를 못하는 것처럼 자네가 아주 조금씩 못미치는 게 약간 답답했어. 그깟 것이 무슨 대수랴마는. 그래두 어쩐지 섭섭하잖아.

흔해빠진 말이라 입에 담기는 싫지만 어쨌든 나는 한형과 함께 있으면 늘 신명이 났습니다. 그날 국밥집에서 연극 대사 외우기보다 더 어렵게 표현을 했건만 그건 아주 먼지 알갱이만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소. 나는 물 밑에 잠겨서 이제부터 한동안 숨도 참고 입도 다물고 눈까지 감고 자신의 고독과 싸워야 하오. 그리고 이런 생각도 해보아요. 오 선배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다시는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어서는 안된다구요. 나는 늘 한형 근처에 가까이 있을 거요. 나중에 자유롭게 만나게 되어도 이런 얘기는 없을 겁니다.

<글:황석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