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의 근원지 ‘지질뗏목’ 비밀 풀리나

  • 입력 2009년 5월 22일 02시 56분


《12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생화학분자생물학회 학술대회에서는 독특한 이름의 세션이 열렸다. 바로 ‘지질뗏목(Lipid raft)’이다. 세포막에서 지질분자가 뗏목처럼 뭉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조를 말한다. 이 독특한 구조가 최근 과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암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알츠하이머병(치매), 광우병, 당뇨 등 많은 질병이 여기서 출발한다는 주장 때문이다.》

세포막에서 뗏목처럼 떠다녀… 바이러스 침입 통로

신체 기능조절 역할… “암-치매 등 질병연구에 활용”

○ 세포막 수용체-신호전달 단백질 싣고 다녀

세포를 둘러싸는 막은 다양한 지질분자로 이뤄져 있다. 보통 세포에 계면활성제를 처리하면 지질분자들이 녹아 세포막이 파괴된다. 1990년대 초반 과학자들은 희한하게도 세포막에 계면활성제에 녹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부분엔 콜레스테롤과 당지질(글리코리피드)이 특히 많다. 덩치가 크고 구조가 독특해 다른 지질분자와 섞이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뭉쳐 돌아다닌다. 그래서 지질뗏목이란 이름이 붙었다.

지질뗏목은 세포막 수용체와 신호전달 단백질들을 싣고 다닌다. 수용체는 바이러스가 세포 안으로 침입하는 통로가 되고, 신호전달 단백질은 세포의 성장이나 이동 등 각종 기능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학회에서 국립암센터 소아암연구과 김용연 선임연구원은 암과 지질뗏목의 관계를 발표했다. 그는 “사람의 자궁경부암 세포막에서 콜레스테롤을 빼내면 지질뗏목이 줄거나 파괴돼 세포가 죽는다”며 “지질뗏목이 많을수록 이런 현상이 더 잘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외국에서는 AIDS나 알츠하이머병도 지질뗏목과 관련 있다는 보고도 나왔다. 뇌에 ‘아밀로이드 베타’라는 단백질이 많이 쌓이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다. 아밀로이드 베타가 바로 지질뗏목에서 만들어진다. 실제로 콜레스테롤이 많을수록 아밀로이드 베타가 축적될 위험이 커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AIDS를 일으키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의 표면에는 gp120이라는 단백질이 있다. 이 단백질이 면역세포의 수용체에 달라붙으면 HIV가 면역세포를 공격한다. gp120의 수용체는 면역세포막의 지질뗏목에 존재한다. 지질뗏목은 단백질 구조도 바꾼다. 단백질 ‘프리온’은 정상 구조일 땐 별 문제가 없지만 비정상 구조로 바뀌면 광우병을 일으킨다. 구조 전환이 바로 지질뗏목에서 일어난다.

○ 지질분자와 액정분자 움직임은 닮은꼴

지질뗏목이 실체가 없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너무 작아 직접 눈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대 생명과학부 고영규 교수는 “지질뗏목의 크기는 20∼400nm(나노미터·1nm는 10억 분의 1m) 정도라 광학현미경으로는 볼 수 없다”며 “물리학자나 화학자, 공학자들이 다양한 기술을 동원해 존재를 증명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이신두 교수는 전자기기의 기판에 지질분자를 붙여 세포막 모방 시스템을 개발했다. 지질뗏목을 인공적으로 재현해보기 위해서다. 같은 학회에서 이 연구를 발표한 이 교수는 “지질뗏목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탄성에너지 차이를 계산하면 세포막 어느 부분에서 지질뗏목이 생기는지 예측할 수 있다”며 “액정 디스플레이(LCD) 분야의 탄성에너지 이론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디스플레이용 액정분자나 세포막 지질분자의 움직임은 모두 탄성에너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액정분자가 전압에 따라 움직이면서 명암과 색깔이 결정돼 영상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지질분자도 뭉쳤다 흩어질 때마다 다양한 생명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질뗏목(Lipid raft):

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막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지질덩어리. 주로 콜레스테롤과 당지질로 이뤄져 있다. 이곳을 통해 바이러스가 세포로 침입하고 단백질 구조가 바뀌며 각종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신호가 전달된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생물학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임소형 동아사이언스 기자 soh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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