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 우리 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6>간도는 어떻게…

  • 입력 2004년 5월 13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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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성(吉林省) 투먼(圖們)시를 지나치자마자 차를 몰던 가이드가 “두만강이오”라고 외쳤다. 물길의 너비가 30m나 될까. 두만강은 지도의 굵은 실선이 연상시켰던 품 넓고 유유한 강이 아니었다. 옌지∼훈춘(琿春)간 국도 302호선과 숨바꼭질하듯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흐르는 두만강은 바지만 걷고도 건널 수 있는 곳이 많았다. 학정과 굶주림에 신음하다가 고향 땅을 등져야 했던 조선 유민들이 건넌 두만강도 이랬을까?》

● 바지만 걷어도 건너는 두만강

“당시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지금보다는 수량이 더 많았고 강기슭의 숲도 더 울창했던 것 같습니다. 10리 간격으로 배치된 국경수비대 군인들의 감시도 있었고요. 하지만 도강(渡江)을 막을 만한 큰 장애물은 없었습니다.”(양태진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장)

두만강과 압록강은 조선인들에게 마치 한강이나 낙동강처럼 국내 하천으로 인식되었다는 게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국경 하천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중국학계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장광차이링(張廣才嶺), 하얼빠링(哈爾巴嶺), 라오이에링(老爺嶺) 등의 산맥과 쑹화(松花)강 같은 큰 물길이 가로막고 있는 둥베이(東北) 지역은 중국 내지(內地)로부터 접근하는 것보다는 조선에서 넘나들기가 훨씬 쉬웠습니다.”(조선족 원로 사학자 C씨)

● 국경은 선 아닌 지대의 개념


중국 지린성 투먼시 인근 302번 국도에서 바라본 두만강. 수심이 간신히 무릎까지 차오를 정도다. 조선 후기 간도 이주의 주요한 통로였던 이 일대에서는 최근 탈북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강 건너편은 북한의 함경북도 온성군.-지린성 투먼시=특별취재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던 간도 지역은 12세기 초부터 500여년간 임자 없는 땅이었다.

“당시 국경은 선(線) 개념이 아니라 지대(地帶) 개념이었습니다. 명대(明代·1368∼1644)에 간도지역은 고려 및 조선과의 군사적 완충지대로 어느 쪽의 일방적인 통제력도 미치지 않는 중립지대였어요.”(박선영 포항공대 교수)

청대(淸代)에 들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청은 1660년대 백두산을 조상의 발상지로 성역화하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을 섬겨야 했던 조선 정부는 간도 영유권과 관련해서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일단 봉금(封禁)조치에는 협조했다. 거기엔 조선 변경에 대한 청나라 사람들의 침탈을 단속할 명분을 얻기 위한 고려도 작용했다.

● 목숨을 건 犯越과 유민 哀史

이후 200여년간 조선과 청은 봉금 합의를 엄격히 지켰지만 목숨을 걸고 범월(犯越)하는 조선인들을 막지는 못했다.

“1867년 여름 새 무산부사(茂山府使)가 부임해 각종 세금과 벌금으로 쌀 10여만 석을 강제 징수했다. 이를 피해 마을사람들이 500여리의 원시림을 뚫고 백두산 기슭으로 들어갔다. 여름에는 더워 죽고 겨울엔 얼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여서 지금도 길가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1872년 압록강 상류 지안(集安) 린장(臨江) 등지의 조선유민 생활상을 기록한 최종범(崔宗範)의 ‘강북일기(江北日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강을 건너 신천지를 찾은 조선 유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원시림과 황무지, 그리고 그곳까지 뒤쫓아온 일부 조선 관리들의 가렴주구였다. 그런데도 이주민은 늘어나기만 했다.

● 결국 淸도 봉금을 풀었으나

그나마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간도에서 피땀으로 마련한 농토는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의 3배나 되는 수확을 안겨 줬다. 처음에는 월강(越江)을 중죄로 다스리던 조선 관리들도 나중에는 이를 눈감아주거나 도와주기까지 했다.

결국 1880년대 청이 봉금을 풀었다. 팽창하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청조의 발상지에 주민을 대거 이주시켜 개발한다는 이민실변(移民實邊) 정책을 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은 쫓겨날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미 간도는 조선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1890년대 무산 종성 회령 온성 경원 대안(對岸)의 조선인은 지역인구의 93%(청측 통계) 또는 98%(조선측 통계)를 차지했다. 조선과 청이 간도문제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 ‘농업혁명’을 일으킨 조선 유민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 하순까지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어는 두만강 압록강 대안지역에 벼농사를 처음 도입한 것은 조선 유민들이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를 ‘농업혁명’으로 높이 평가한다.

“‘이밥(흰 쌀밥)은 뼈밥’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족은 얼음이 서걱거리는 강물에 들어가 보를 막고 도랑을 냈다. 쌀을 수입하던 둥베이지방은 1910년대 말부터 쌀을 수출하게 됐다.”(‘중국조선족역사상식’ 중)

벼농사는 1870년대 퉁화(通和) 옌지(延吉) 등에서 시작돼 압록 두만 하이란(海蘭) 무단(牧丹) 쑹화강 유역으로 퍼져 나갔다. 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에 따른 쌀값 급등이 벼농사 확산의 중대 전기가 됐다.

● 민족의 피땀이 어린 간도

그와 함께 조선 유민들은 동북 3성(省) 전역의 강 유역과 평지로 거주지를 넓혀 갔다. 1933년에는 북위 50도의 헤이룽(黑龍)강 연안에서 벼 재배에 성공하는 ‘기적’을 이뤄 내기도 했다.

중국 통계에 따르면 1920년 현재 동북 3성 주요 지역 무논의 80∼100%는 조선족이 개간한 것이었다. 1934년 동북 3성 총 인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3.3%에 불과했지만 조선족의 벼 생산량은 전체 수확량의 90.1%에 달했다.

간도의 황무지가 비옥한 옥토로 바뀌는 과정은 곧 조선 유민들이 간도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우뚝 서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그 이상의 역사가 숨쉬는 곳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간도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항일독립운동의 주 무대가 됨으로써 개척의 역사에 투쟁의 역사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 원로 사학자 C씨는 이렇게 말한다.

“개척과 투쟁으로 삶의 근거지를 다지고 지켜 왔다는 점에서 조선족은 중국의 30여개 과계민족(跨界民族·주변 국가로부터 국경을 넘어 들어온 소수민족이라는 뜻) 중에서도 아주 유별난 사례입니다.”

투먼·옌지=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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