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비핵화 발언과 공동선언 합의는 멈춰 선 북-미 협상의 재개를 위해 문재인 대통령이 설득에 공을 들인 결과로 볼 수 있다. 김정은이 처음으로 비핵화 의사를 자신의 육성으로 밝힌 만큼 의미도 있다. 4·27 남북 판문점선언과 6·12 북-미 공동성명에 ‘완전한 비핵화’가 명기됐지만 김정은은 그간 한 번도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수령 절대 체제에서 김정은의 발언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인 만큼 보다 분명한 대외적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의 발언은 동시에 미국을 향한 촉구의 메시지다. 비핵화는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도, 미국의 대북 핵위협도 모두 없는 ‘조선반도 비핵화’여야 한다는 의미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핵전쟁 연습’이라고 비난해온 북한이다. 북한의 비핵화에 상응해 미국은 군사훈련 중단은 물론이고 한국에 대한 핵우산이나 확장억제 공약도 폐기해야 한다는 속뜻도 깔려 있다. 향후 한미 동맹 간 안보 공약이 약화되는 일이 없도록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북한은 당장 미국이 요구하는 핵 신고, 즉 폐기할 핵무기와 시설 리스트의 제출은 언급하지 않았다. 동결과 불능화, 검증을 거쳐 완전한 핵폐기에 이르는 시간표도 제시하지 않았다. 물론 두 정상이 심도 있는 논의를 한 만큼 비공개 논의 내용도 적지 않을 것이지만, 명시된 합의 내용만으론 만족스러운 성과라고 평가하기는 이르다.
결국 진전된 비핵화 조치는 앞으로 미국의 상응조치에 달려 있다며 공을 넘긴 것이고, 미국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관건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평양 합의가 나온 즉시 트위터를 통해 “김정은이 핵사찰을 허용했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전문가 참관이 핵사찰을 뜻하는 것은 아니어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나친 의미를 부여했을 수도 있고, 공개는 안 됐지만 김정은이 문 대통령에게 사찰 수용 의사를 밝혔을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뉴욕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는 만큼 이 자리에서 보다 분명한 미국의 입장이 나올 것이다.
아울러 김정은은 가까운 시기에 서울을 방문할 것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가까운 시일이란 말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올해 안이라는 의미”라고 부연 설명했다. 성사된다면 북한 최고지도자의 서울 답방은 분단 이래 처음인 대사건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일의 답방이 합의문에 명기됐지만 희망사항에 그친 바 있다. 정상회담이 세 번씩이나 평양에서 열린 만큼 다음엔 서울에서 열리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하지만 현재로선 기대 못지않게 우려가 큰 게 사실이다. 자칫 남남(南南) 갈등이 격화되고 찬반 시위로 표출될 가능성도 크다. 이런 갈등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선 북한의 과감한 비핵화 조치가 선행돼야 함은 물론이고 우리 정부의 세심한 노력도 절실하다. 문 대통령은 어제 “그동안 전쟁의 위협과 이념의 대결이 만들어온 특권과 부패, 반인권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를 온전히 국민의 나라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반북(反北) 정서마저 ‘적폐’로 보는 것은 아닌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문 대통령이 ‘연내 답방’을 강조한 것은 우리 정부의 ‘연내 종전선언’ 목표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김정은의 서울 방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합류를 요청해 남북미 3자가 함께 종전선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미 비핵화 협상이 재개돼 북한이 실질적인 비핵화 과정에 들어섰을 때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