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투병문학상 수기]'산송장' 기다린 아내…"살아야 한다"

  • 입력 2002년 5월 26일 17시 39분


동아일보사와 인제대 백병원이 주최하고 한국MSD가 후원하는 ‘제2회 투병 문학상’의 최우수상은 고엽제 피해자인 허만선씨(57)에게 돌아갔다. 원고지 40장 분량인 허씨의 원고를 요약 소개한다. 전문은 인터넷 동아닷컴(www.donga.com)에서 볼 수 있다.

1970년 3월 월남에서 20개월간 정글을 헤매다 돌아와 전역과 동시에 부산의 금형 제작 공장에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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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문학상 선정 수기 전문

40여명의 전사원이 합심해 도산의 위기에 처한 공장을 되살리는 등 우여곡절 끝에 회사 채무도 모두 청산되고 직원이 배로 느는 등 회사가 안정을 찾아가던 1978년 10월3일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장을 둘러보고 사무실로 향하는데, 갑자기 눈에서 불이 번쩍이더니 머리가 깨어지는 듯한 통증이 오면서 아득한 벼랑으로 떨어져가듯 의식이 멀어져 갔다.

나는 메리놀병원에서 다음날에야 깨어났다. 첨단장비가 망라된 온갖 검사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엔 가려움증이 온몸을 휩쓸었고 통증이 몰려왔다. 호흡이 가빠졌고 몸은 경련하면서 머리는 시계추처럼 돌아갔다. 증세에 따라 온갖 진료가 이어졌지만 하루가 다르게 악화만 돼 나는 결국 머리, 가슴, 배를 밴드로 침대에 묶고, 진정제로 급한 경련의 불을 끄곤 했으나 약 기운이 떨어지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나는 의식마저 잃어버렸다.

의사는 치료를 포기했지만 아내는 살림집을 팔아 서울로 향했다. 일류 병원, 한의원도 실망만 안겨 주었다. 기도원, 산사에도 가 보았다. 용하다는 점쟁이의 비방과 무당의 굿거리도, 도사의 단방약도, 흡혈귀처럼 돈만 빨아먹을 뿐이었다.

결국은 빈털터리가 돼서 모든 걸 체념하고 낙향, 아내는 의식 잃은 나와 자식들을 이끌고 북망길이 가까운 선산 밑의 폐가에서 살게 됐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도 생명이지만 질기고 질긴 것도 생명이었다. 1990년 열 두 해나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내가, 자꾸만 귓가에 맴도는 소리에 이끌려 살며시 눈을 떴다.

그 소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지친 아내가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였다.

“여보, 당신이 살아만 있어도 우린 행복할 수 있어요. 고난의 땅에 피는 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꼭 올 거예요.”

그리고는 약초즙을 들고 나와서 마시게 했다. 나는 그 쓰디쓴 약에다 아내의 정성, 눈꼬리에 매달려 있는 눈물 한방울도 함께 마셨다.

“그래, 아내의 말대로 좋은 시절이 올지도 몰라, 아니 오도록 만드는 거야,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억울해!”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아이와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후 유일하게 움직여지는 머리를 지렛대 삼아, 팔과 다리의 굳어진 관절을 꺾고 펴며, 허리를 들어올려 몸의 유연성을 기르면서, 통나무 굴리듯 몸을 굴리면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이와 아내는 피부가 벗겨져 방바닥이 피로 물드는 것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

그런 고통스러운 노력의 결과로 다음해 여름이 왔을 땐 중풍 환자처럼, 뇌성마비 환자처럼 팔다리를 허우적대면서 가까스로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뒤뚱거리며 넘어질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나마 집안을 다닐 수 있게 되자 아이와 아내를 인근의 도시로 내 보냈다. 아이의 교육과 생계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겨우내 목발이 부러져 나가도록 걷기 연습을 하여 다시 계절이 바뀌었을 땐 윗산 선영까지 갈 수가 있었다.

1992년의 4월 어느날, 사지를 깃발처럼 휘저으며 산책에서 돌아와 식은 밥을 한술 뜨고 9시 TV 뉴스를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TV의 화면을 가득 메운 정기가 빠져버린 군상들. 찌그러지고 뒤틀리고, 썩어가고…. 해골같이 말라버린 모습들! 그들은 모두가 월남 참전용사였으며, 아나운서는 고엽제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미국은 종전 뒤 3년에 걸쳐 역학조사를 실시했고, 참전국에 사실을 통보한 뒤 보상을 실시했는데 당시 정부와 다음 정권도 이 모든 사실을 숨겨 버렸던 것이다.

참전 용사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마지 못해서 당국은 피해자 신고를 받았다.

저마다 공신력을 높이려 3차 진료기관의 진단서와 신원증명의 서류를 제출하고 6개월이나 기다린 뒤 검사를 받았는데 한꺼번에 수백 명씩 몰리고, 의사들은 당국의 지침인 비호지킨 림프샘암, 연조직 육종암, 말초 신경병, 염소성 여드름의 네가지 이외에는 무조건 탈락시켰다.

나는 1급 증상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당시 진단서에는 온갖 병명이 빼곡히 차 있었다. 말초 신경병, 비골 중추 신경염, 근위축, 불수의 운동, 다발성 신경마비, 다발성 골수종, 류머티스 관절염, 폐기종, 고지혈증, 재발성 연골염 ….

나는 당장 중증이면서 탈락한 전우 몇 명을 찾아내 내가 받은 연금을 쪼개 지원하며 중앙 일간지에다 고엽제 환자의 비참한 생활을 알리면서 수혜 폭을 늘리라는 투고를 하기 시작했다. 법 개정을 거치면서 피해자 구제 범위가 확대되어 탈락자들이 거의 모두 구제되었다.

나는 전우에게 주던 후원금을 영아원과 보육원, 양로원에 주기 시작했고 장애인이지만 부끄럽지 않은 아비, 남편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아직도 보행과 섭생, 배설 등 모든 것이 불편하고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삶이 보람 있고 마음은 즐겁다. 어느날 불행이란 놈이 불쑥 찾아와 나는 물론 가족을 끊임없이 절망케 했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세상을 얻게 됐다.

허만선(57) 경남 진주시 대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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