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 게임월드]블랙 앤 화이트

  • 입력 2001년 5월 27일 18시 24분


◇ 믿음 강할수록 더 강해지는 힘

세상은 ‘믿음’ 위에 세워졌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합의에 기반해 근대 국가가 세워졌고, 사회란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믿음이 겹겹이 교차되어 구성된 곳이다. ‘블랙 앤 화이트’는 믿음을 이야기하는 게임이다.

게이머는 신이 된다. 신자들이 올리는 기원을 듣고 신의 사자(使者)인 ‘크리처’를 보내 여러 가지 일을 한다. 신의 힘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는가’에 따라 정해진다. 믿음이 크고 기원이 간절하면 할수록 더 강한 힘이 생기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끝난다면 ‘믿음이 세상을 만든다’는 어찌보면 식상한 내용의 게임이다.

하지만 이 게임을 만든 피터 몰리뉴는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진다. 믿음이란 어떻게 생기는가? 사람들은 왜 믿음을 가지게 되는가?

굶주린 사람들 앞에 잘 구운 쇠고기와 갓 캐낸 감자를 가져다 놓는다. 사람들의 신앙심은 갑자기 증가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줄 때도 믿음이 커진다. 농지를 개간하도록 터를 닦아주고 산에서 목재를 날라다주면 신앙심이 증가한다.

그런데 선하고 유익한 일을 했을 때 생기는 믿음과 사람들에게 번개를 때리고 집을 부수며 얻는 믿음의 질에는 차이가 없다. 있다면 양의 문제인데, 일반적으로 사랑의 신보다는 공포의 신이 더 큰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잔인하고 무시무시하다는 건 그들의 믿음에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식을 희생물로 바치면서까지 더 크고 강한 힘을 원한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은 엄청난 힘을 만들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희생물이 필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게임 제작자로 꼽히는 피터 몰리뉴의 게임들은 항상 비뚤어진 유머 감각으로 무장하고 있다. 사람들의 선한 얼굴보다는 악한 얼굴에 주목한다. 보람차지만 느리고 힘든 선한 신의 길을 포기하고 환호 속에 벌어지는 광기 어린 인신 공양 축제를 선택하는 게이머의 등뒤에서 그는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다.

사회를 지탱하는 ‘믿음’이란 것에 대한 그의 통찰은 슬프게도 너무나 정확하다. ‘블랙 앤 화이트’는 믿음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준다.

믿음에 의해 지탱되는 사회는 무너지기 쉬운 토대 위에서 간신히 서있다. 아주 조그마한 이익만으로도 쉽게 깨지고 화려하게 포장된 새로운 믿음이 금방 그 자리를 대치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걸 믿는 게 아니라 믿기로 작정하면 그 정당성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믿는 것에 대한 정당화 작업은 너무나 수월하고 빠르게 이루어진다.

(게임평론가)SUGULMAN@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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