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이야기]전쟁과 날씨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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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민 케이웨더 공기지능센터장
차상민 케이웨더 공기지능센터장
삼국지의 적벽대전은 위나라 80만 대군을 10만 명에 불과한 오·촉 연합군이 남동풍에 힘입어 화공(火攻)으로 섬멸한다는 얘기다. 나관중의 소설에서는 북서풍의 계절인 겨울에 제갈량이 제단을 쌓고 기도해 남동풍을 일으켰다고 썼지만 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에서는 제갈량이 평소 날씨를 세심히 관측하고 바람과 구름을 연구해 일종의 날씨예보를 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공격 시점을 기다리던 오나라 장군 주유에게 제갈량은 동짓날 밤 1시부터 바람의 방향이 바뀔 것이라 했고 주유는 이를 기해 조조의 군대를 공격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적벽대전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길은 없으나 역사 속에서는 사상 최대의 군사 작전을 앞두고 날씨예보를 간절히 기다리던 긴장의 순간이 있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위해 막대한 군사력을 대기시켜 놓은 연합군 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침공 시기를 결정하기 위해 날씨예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륙 작전 날짜를 6월 5∼7일로 정했는데 이 기간의 일기예보가 서로 달랐다. 노르웨이 예보관은 기상 악화로 작전이 불가능하다고 본 데 반해 미국인 예보관은 평온한 기상을 예측하여 디데이(D-Day)를 5일로 제안했다. 그러나 작전일이 다가올수록 날씨는 점차 험악해져 상륙 작전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센 바람이 불었다. 노르망디를 관할하던 독일군 명장 에르빈 로멜은 방심해 아내 생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기상학의 베르겐 학파 분석 방식에 따라 기상 악화를 예견했던 노르웨이 예보관은 이번엔 6일 아침에 바람이 소강상태를 보일 것이라고 예보했고 이는 즉시 아이젠하워의 상륙 명령으로 이어졌다.

베르겐 학파는 공기가 덩어리(기단)로 움직이며 기단이 서로 만나는 곳에서 기상 변화를 일으키는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발견했다. 날씨예보에 ‘전선(front)’이란 군사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맹활약했다. 노르웨이의 기상학자 빌헬름 비에르크네스는 일기예보가 수학과 물리학에 기반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를 따르는 베르겐 학파는 당시 미흡했던 수학적 방식보다는 실용적인 도해 방식을 선호했다.

일기예보를 수학적 방정식 모델로 발전시킨 사람은 전쟁을 미워한 영국의 수리물리학자 루이스 프라이 리처드슨이다. 그는 1차대전이 발발하자 구급차 운전병으로 환자를 실어 나르는 일을 하면서도 기상 예측을 위한 방정식을 푸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자신의 연구가 전쟁에 활용되는 것을 우려해 연구를 중단했다. 수학적 방정식에 의한 날씨예보라는 리처드슨의 꿈을 현실로 만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46년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ENIAC)’이었다. 에니악은 다음 날의 날씨예보를 계산하는 데 24시간이 걸려 당일 날씨를 확인하는 꼴이 됐지만 결과는 실제 날씨와 비슷했고 이는 수학적 방정식에 의한 기상예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전쟁과 날씨예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서로 깊은 관계가 있다. 국내에서도 1963년 시작된 첫 대북방송이 날씨예보일 정도로 전쟁과 인연이 깊다. 북한보다 정확한 날씨예보가 방송 내용의 신뢰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지난달 1일 대북방송이 중단됐다. 그나마 한반도에 드리웠던 전쟁의 먹구름이 걷히고 있어 다행이다.
 
차상민 케이웨더 공기지능센터장
#일기예보#에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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