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리더는 결정한다, 고로 존재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세상을 바꾼 아이폰 첫 출시 때… 잡스, 소비자에게 묻지 않았다
독일사회 反난민여론 들끓어도… 메르켈, 포용정책 꿋꿋이 유지
민심존중과 여론추종은 다르다… 원전 등 국가미래 달린 정책결정
여론과 공론화 뒤에 숨지 말라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폰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그 아득했던 느낌. 버튼에 익숙한 아날로그 세대에게는 손가락만 대면 작동하는 멀티터치스크린이 두렵게 다가왔다. 지금이야 버스정류장 안내판에도 등장할 만큼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됐지만.

‘모든 것을 바꾼’ 아이폰을 스티브 잡스가 세상에 내놓은 지 올해로 10주년이다. 모바일 시대의 혁신이 가능했던 것은 잡스의 창의적 경영과 뚝심 덕이다. 세상을 뒤흔든 제품을 출시하면서도 사전 시장조사를 한 적이 없다. 기존 마케팅이론이란 것을 대놓고 거스른 셈이다. 왜 그랬을까. 교만해서? 아니면 소통하기 싫어서? 잡스의 유명한 어록이 여기서 등장한다. “소비자에게 어떤 제품을 원하는지 묻지 말라, 어떤 제품을 원할지는 소비자들도 모른다.” 상상치도 못한 제품을 실물로 보여줄 때 비로소 자기가 원하는 게 무언지 깨닫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뜻이다.

남다른 소신은 경영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유효하다. 2015년 이후 100만 명 넘는 난민을 받아들인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뚝심을 보면 알 수 있다. 반(反)난민 정서가 들끓는 상황에서도 포용정책을 밀고 나갔다.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정책에 동의한다는 답이 26%까지 추락했으니 그 과정이 순탄할 리 없다. 야당과 시민들의 거센 반발은 물론 당내 반응도 싸늘해졌다. 사면초가 같은 여건에도 의연했다. 오래 축적된 정치적 내공 때문일까. 메르켈 총리는 “인도주의적 입장을 거부하는 것은 더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긴 안목으로 볼 것을 독일 사회에 호소했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정책 수정은 있었지만 기조는 유지했다.


이달 초 사상 첫 유럽연합장(葬)으로 치른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의 장례식에서 메르켈 총리는 “콜 총리가 없었다면, 나를 포함해 1990년까지 베를린 장벽 뒤에서 살았던 수백만 명의 삶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메르켈의 독일’이라면 아마도 장차 메르켈로 인해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얘기할 사람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마치 둑 터지듯 무너진 독일장벽의 그날 이후처럼. 이렇게 한 나라의 전통이 쌓여 가는 것이다.

편한 길 놔두고 가파른 오르막을 선택한 잡스의 배짱과 메르켈의 신념은 우리의 리더십과 대비된다. 문재인 정부는 탈(脫)원전 공약을 지키기 위해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과 원전 백지화의 공론화 진행을 발표했다. 백년대계나 다름없을 국가 에너지 정책의 의사결정 기능을 시민에게 떠넘긴 셈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민주를 표방한 상습적 여론정치는 어쩌면 민주정치를 퇴행시키는 악습이 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때에 따라 만만찮게 반론이 나올 사안은 은밀하게 독단적으로 추진한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코레일과 철도시설공단 통합을 노동계에 약속한 사실이 알려졌다. 철도개혁을 위해 노무현 정부가 분리한 것을 뒤집겠다고 방향을 이미 정했다면 이후 과정은 보나 마나. 이런 식이면 민심을 무겁게 받드는 건지, 여론 완장을 방패막이로 써먹으려는 건지 국민은 헷갈린다. 공론(公論)을 빙자한 공론(空論)의 그림자가 벌써 어른거린다.

앞서 말한 잡스의 경영철학을 다룰 때 어김없이 헨리 포드의 일화가 따라붙는다. 포드는 1908년 세계 최초의 대량생산 차인 ‘모델T’를 내놨다. 평범한 미국인도 구입 가능한 가격에 나온 모델T는 ‘국민차’로 자리매김했다. 포드는 회상했다. “내가 만약 대중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면 그들은 ‘더욱 빠른 말’이라고 답했을 것이 뻔하다.” 고객 존중과 고객 추종은 다른 문제다. 고객이 그러한데 국민은 오죽하랴.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공동체를 위한 본질적 변화가 진정 무엇인가 고민하고 이를 나침반으로 미래를 개척해가는 진정한 지도자다. 안 가본 길엔 위험이 따른다. “여론이란 것은 없다. 공표된 의견만 있을 뿐”(처칠) “이 나라에서 여론은 모든 것이다”(링컨)처럼 정책과 여론의 연계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여론 수렴이나 국민 참여란 것이 듣기 아름답긴 해도 국론 분열의 소모전이 될 가능성 역시 다분함을 유념할 일이다.

국가 지도자의 힘은 여론 편승이 아니라 통찰력과 강한 책임의식의 리더십에서 나온다. 리더는 결정하고 책임지는 자리다. 그것이 리더의 존재 이유다. 갈대 같은 여론에 기댄 갈대 같은 리더십이라면 그 나라의 앞길은 무성한 갈대숲에 파묻힐 게 뻔하지 않을까.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리더는 결정한다#스티브 잡스#메르켈 포용정책#국가 지도자의 힘#리더십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