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개성공단 철수, 긴 여정의 시작일 뿐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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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철수는 자체처방전… 의미는 있지만 불쏘시개
관련국에 주는 영향은 제한적… 북핵 외통수에 갇힌 박근혜 외교
실패를 예견하지 않은 실패로… 3년 전 출범 당시로 완전 회귀
뉴노멀이 노멀화하는 요즘, 외교적 상상력을 발휘해
모든 시나리오 테이블에 올리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수밖에

심규선 대기자
심규선 대기자
개성공단 철수는 충격요법이며 극약처방이다. 행위 자체의 상징성이 크다. 그래서일까, 대통령의 고뇌와 결단을 상찬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북한의 약점과 허를 찌름으로써 큰 타격을 줬다는 평가도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용비어천가는 성마르다.

개성공단 철수는 주사다. 효과는 미지수다. 병소(病巢)를 완전히 도려내는 수술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병소는 20년간 숱한 주사를 맞으며 내성을 키워온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다. 목표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데 수단의 공과를 따지는 것은 잔망스럽다.

개성공단 철수가 국제사회에 던진 상징성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자체 처방전이라는 의미는 있으나 불쏘시개 성격이 강해서다. 국제사회는 개성공단 철수에서 한국의 의지를 읽는다. 그러나 행동은 별개다. 미국은 강력하고 빠르게 대북제재법안을 만들고 일본도 자체 제재에 나섰다. 두 나라는 한국이 군불을 때지 않아도 그랬을 것이다. 북한이 노선을 바꿀 것 같다는 조짐은 어디에도 없다. 중국과 러시아의 태도는 예상보다 더 실망스럽다. 그러니 개성공단 철수 효과는 제한적이다. 철저하게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관련국들을 구속하지 못한다. 남북대화가 꽉 막힌 마당에 5·24조치나 8·25합의는 의미가 없는 이치와 같다.

북한 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 철수와 그 이후의 한국 외교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던 3년 전으로 완전히 회귀했음을 의미한다. 미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 것은 언감생심이며, 일본과의 협력은 여전히 필요하고, 북한에 대한 근거 없는 기대는 금물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미국 편중 외교의 조정, 중국경사론까지 감수한 열렬한 구애, 역사를 앞세운 대일본관계 재정립, 통일대박으로 상징되는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중요 외교 목표들이 모두 빗나간 것이다.

이런 분석은 사대주의, 패배주의의 소산이며 주인의식의 결여라고 비판하는 분위기가 예전보다 강하다. 그런 비판의 가장 오른쪽에 핵무장론이 있다. 동의하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동북아 평화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무엇인가. 비록 실패로 끝나가고 있지만 자주 의식의 표현으로 본다. 더욱이 위기 국면에서 반작용으로 나오는 대안은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

다만, 작금의 상황에서 우려스러운 흐름들이 있다. 우선 중국과의 관계 재설정을 대통령의 중국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설명하려는 시각이다. 중국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중국의 속성과 한계를 애써 무시해 온 우리의 잘못이다. 국가 지도자끼리의 친소관계는 중요하지만 외교의 전부는 아니다. 국익 차원의 결정을 스스로 왜소하게 만들어선 곤란하다.

국제사회에서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는 데 대한 고민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뉴노멀의 노멀화’가 진행 중이다. 비정상적인 것이 일상화, 고착화된다는 의미다. 북한 핵은 막아야 하지만 제재 효과를 확인하지 못한 국제사회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슬람국가(IS)’는 타도해야 하지만 세계의 대오는 예전처럼 일사불란하지 않다. 난민은 수용하는 게 옳지만 반대하는 지도자가 더 인기다. 중국의 패권주의는 경계하지만 경제협력은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 세계는 협력과 갈등, 압력과 포용, 교착과 진전, 연대와 이탈이 공존하거나 교차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대응은 힘들다.

북핵 문제는 다자 현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민감한 리트머스시험지가 되어 버렸다. 대통령의 국회 연설 요청은 시의적절하다. 내일 국회 연설에서는 이미 한 행위에 대한 설명은 줄이고, 현 상황에 대한 평가와 미래의 복안을 듣고 싶다. 국내에서는 사실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정파에 따른 이념논쟁은 무의미하며 북풍 운운은 철 지난 공세일 뿐이다. 국제적으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관련 국가와 집단의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래도 진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어느 수준의 해결이든,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상정하고 인내해야 한다.

북핵 문제로 한국 외교가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실패를 예견하지 않은 실패 때문이다. 제2, 제3의 시나리오를 준비해 놓지 않은 탓에 막다른 골목을 만나자 지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 자만의 역풍을 부인하기 어렵다. 북핵은 우리에게 외교적 상상력을 동원해 새판을 짜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개성공단#박근혜#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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