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조성하 기자의 힐링투어]<2> 제주 갑마장길 홀로 걷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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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목장길 따라 느릿느릿 걷다가, 오름 풍경에 취하다

‘혼자서 걷는 길이 생각에 몰입할 수 있어 좋다. 살아온 자취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삶의 고개를 헤아린다.’ 법정 스님의 이 말대로 고적하고 호젓한 가시리의 쫄븐갑마장길은 혼자 걸어야 제격이다. 굼부리 세 개가 어울린 따라비오름의 한 능선. 제주=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혼자서 걷는 길이 생각에 몰입할 수 있어 좋다. 살아온 자취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삶의 고개를 헤아린다.’ 법정 스님의 이 말대로 고적하고 호젓한 가시리의 쫄븐갑마장길은 혼자 걸어야 제격이다. 굼부리 세 개가 어울린 따라비오름의 한 능선. 제주=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 ‘보행(步行)이란 얼마나 자유스럽고 주체적인 동작인가. 맑은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스척스척 활개를 치면서 걷는다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보행은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내가 내 힘으로 걸어가는 길이다…

혼자서 걷는 길이 생각에 몰입할 수 있어 좋다. 살아온 자취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삶의 고개를 헤아린다.

인간이 사유(思惟)를 하게 된 것은, 모르긴 하지만 보행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한곳에 멈추어 생각하면 맴돌거나 망상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걸으면서 궁리를 하면 막힘이 없이 술술 풀려 깊이와 무게를 더할 수 있다. 칸트나 베토벤의 경우를 들출 것도 없이, 위대한 철인이나 예술가들이 즐겨 산책의 길에 나선 것도 따지고 보면 걷는 데서 창의력을 일깨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가시식당의 별미요리인 돼지고기 두루치기.
가시식당의 별미요리인 돼지고기 두루치기.
이건 법정 스님의 ‘서 있는 사람들’(수상집·1978년 5월 초간)에 실린 ‘直立步行(직립보행)’이란 글의 일부다. 이 글이 쓰인 건 1977년 2월, 오팔년 개띠인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다. 이 책은 작아 한 손에 잡힌다. 아이패드 미니 사이즈다. 책장은 갱지. 세월이 세월(1982년 발행된 중판)인지라 누렇다 못해 붉게 바래 고색창연하다. 활자는 작고 활자체도 고풍에다 세로 인쇄다. 골동의 품격은 물론이고 고서의 반열에도 들 만하다.

가시리(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여행기에 책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 이 낡은 책을 통해 내 스스로 치유 됨을 느껴서인데 그건 스님과 맺은 가녀린 인연의 줄 덕분이리라. 1994년. 나는 종교담당 기자였다. 그래서 당시 스님이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인기 칼럼 ‘산에는 꽃이 피네’의 원고 심부름도 맡았다. 그때 스님께선 강원도 산골짝에서 홀로 수행 중이셨다. 그래서 원고는 한 달에 한 번 상경해 직접 넘겨주셨다.

활어횟집 도두대경의 해물코스 중 참돔회.
활어횟집 도두대경의 해물코스 중 참돔회.
나는 그때 받아든 스님의 육필과 문방구에서 살 수 있던 그 원고지를 잊지 못한다. 글씨엔 성품이 담긴다는데 꼭 그대로였다. 스님처럼 소박했다. 원고 자체도 덧댐이나 고침이 거의 없이 깔끔 정갈했다. 그런데 이 오랜 수필집과 마주한 순간, 그간 잊고 지낸 스님이 내 기억의 세계에 되돌아오셨다. 만나 뵐 때마다 들려주시던 이야기와 그 모습으로. 그 세월이 벌써 19년, 스님은 3년 전 세상을 뜨셨고 나 역시 반백의 오십 중반이다.

되돌아본 세월엔 아쉬움만 담기기 마련. 그런데 내겐 그런 회한이 없다. 오히려 입가에 빙긋 미소까지 담길 만큼 여유롭다. 짧긴 해도 스님과 나누었던 소중한 시간, 게서 얻은 가르침 덕분이리라. 스님 모습을 똑같이 닮은 이 글과 해후까지 하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삶을 다시 배우고 흉내 낼 기회를 얻은 덕은 아닐지….


이 책은 내 것이 아니었다. 한 달 전 서울 종로1가 빌딩 지하의 헌책방(아름다운가게)에서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거긴 매일 새 책으로 덮인다. 모두 뭇사람 손에서 버려지거나 기증된 헌책이건만 그게 내겐 늘 ‘새 책’이다. 이 책 ‘서 있는 사람들’도 그 무더기에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냉큼 집어 들고는 서둘러 책장을 넘겼다. 그때 처음 편 쪽이 이 ‘직립보행’. 산중 암자의 스님이 모처럼 찾은 도시에서 겪은 수선스러움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를 적고 있는데 가시리로 떠나는 치유 여행은 그걸 읽는 중에 자연스레 계획됐다.

오로지 걷기 위해서라면 세상 도처 모든 길이 목적지일 터. 그러나 스님처럼 ‘홀로 걸으며 생각에 몰입하려면’ 마땅한 곳을 찾아야 한다. 오가는 사람이 없고 자연은 수려하며 주변은 호젓해야 할 듯…. 그 점에서 가시리가 제격으로 다가왔다. 제주 섬에서도 관광객 발길이 뜸한 동부, 게서도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초원의 방목장뿐이라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중산간 지대라서다.

가시리에 말목장이 들어선 건 700년 전 고려 때. 열세 개 오름으로 둘러싸인 초원의 분지가 말을 모아 키우기에 적당해서다. 이런 요지를 몽골족의 원나라가 그냥 놔둘 리 없다. 호마를 방목시킨 후엔 모두 가져갔다. 그렇게 시작된 말 사육 역사는 조선시대로 이어졌고 국가에 공납할 말이 방목됐다. 일제강점기엔 대륙 침공과 태평양전쟁에 쓰일 군마가 징발됐고. 조선시대에 제주도는 섬 전체가 말 방목장이었다. 그런 중에서도 가시리는 특별했다. 왕실과 군대가 필요로 하는 최우수급인 ‘갑마(甲馬)’만 키워내는 마장(馬場)이었다.

그러니 가시리를 걷는다고 함은 곧 갑마장 목장 길을 걸음이다. 생각해보라.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한가로이 노니는 말이 이루는 평화로운 풍경을.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있음을. 길은 목장을 따르고 노란 유채꽃이 바다를 이룬 평원도 지난다. 오름도 몇 개 오르내린다. 그 오름 등성 아래로 펼쳐지는 중산간의 풍치. 제주 섬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풍광은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 않다. 풍력발전기의 바람개비 외 인공의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어서다.

그 ‘갑마장 길’은 명품급이다. 편안히 걸을 수 있게 바닥은 섬유질 그물망으로 덮었다. 코스는 두 개. 7시간(평균 시속 3km 기준) 20km(갑마장길)와 그 절반의 10km(쫄븐갑마장길)다. 두 길은 모두 ‘따라비오름’을 경유한다. 가시리 사람들이 제주 섬 368개 오름 중 가장 예쁘다고 자랑하는 오름이다. 이 오름엔 굼부리(용암이나 화산재 분출 없이 일어난 폭발로 생긴 구멍)가 세 개. 주변의 여섯 구릉이 이 굼부리와 어울리는 경치도 아름답지만 가을이면 이걸 뒤덮는 억새도 장관이다.

그런 가시리에선 등산복보다 평상복이 좋을 듯싶다. 목장길에 부드러운 능선의 낮은 오름이 대부분이라서다. 바닥도 부드러우니 두툼한 밑창의 신발이면 좋을 터이다. 그래야 ‘직립보행’의 법정 스님처럼 ‘맑은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스척스척 활개를 치면서’ 유쾌하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초원의 말 구경에 족한 관광객이라도 따라비오름만은 꼭 오르라고 권한다. 나무계단으로 20분만 오르면 된다. 거기선 조랑말체험공원과 풍력발전단지, 말 목장을 아우르는 멋진 경관도로인 녹산로가 멀리 한라산 자락을 배경으로 훤히 조망된다.

표선 해비치 해변에 자리잡은 해비치 호텔&리조트의 야외풀. 섭씨 30도의 온수다.
표선 해비치 해변에 자리잡은 해비치 호텔&리조트의 야외풀. 섭씨 30도의 온수다.
▼ 서귀포 해안 ‘해비치 리조트’ 곶자왈 숲가 유리천장 건물 소파에 묻혀∼ ▼

제주 섬엔 어느 호텔이 힐링에 제격일까. 나는 표선면(서귀포시) 해안의 ‘해비치 호텔&리조트’(호텔 콘도)를 추천한다. 첫째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따사로운 햇빛이다. 햇빛은 해비치 건축의 핵심이다. 유리 천장의 건물(12층)은 그 자체로 거대한 실내 공간이다. 그걸 ‘아트리움(atrium)’이라고 부르는데 제주의 햇빛이 여과 없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온다. 춥고 바람 세던 겨울날. 아트리움의 햇볕 잘 드는 곶자왈 작은 숲가, 소파에 파묻힌 채로 실내에 흐르는 음악을 듣는다.

두 번째 이유는 따뜻한(섭씨 30도) 야외 풀이다. 수영과 온천은 기분을 좋게 한다. 그 요체는 따스함과 체중을 10분의 1로 줄이는 부력, 피부와 물의 부드러운 마찰. 이 봄 따사로운 볕 아래 온수 풀에 몸을 담근 채 싱그러운 바람과 해맑은 공기를 즐기는 해비치에서 하루. 지금까지 어떤 제주 여행보다도 안락하지 않을까 싶다.

세 번째 이유는 제주 토속의 트리트먼트 스파다. 그건 전신에 혈액 순환에 좋다는 마유(馬油·말의 지방조직에서 추출한 지방 성분으로 화장품 원료로 쓰임)를 바르고 기혈을 강하게 짚는 전신 마사지. 적당한 가격의 맛깔스러운 토속 요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최우선으로 나는 호텔 종업원의 미소를 꼽는다. 햇빛 충만한 아트리움 덕일까. 직원들 얼굴엔 늘 미소가 담겨 있다. 생각해 보니 체류하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편안함은 그 미소에서 온 듯했다. 힐링이 무언가. 내 마음을 평화로 이끄는 현상이다. 미소 띤 그 얼굴이 나를 그리로 이끌었다고? 그러면 그것으로 힐링은 이미 이뤄진 것이다.

해비치 호텔&리조트 제주: 3월 말까지 스탠더드원룸 객실(32평·4인 기준 18만9000원)에 다양한 특별서비스(식당 15% 할인 등)가 포함된 할인패키지 제공. 온라인 예약 시 2만 원 할인과 오션뷰 업그레이드(선착순). 주말은 8만 원 추가. 3만3000원 추가 시 K5 혹은 YF쏘나타 렌털(24시간).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40-69. 064-780-8000, www.haevichi.com

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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