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김용택]나의 영화 데뷔(?)기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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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이창동 감독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바쁘실 테니 할 말 있으면 전화로 하자고 했더니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얼마 후 서울 어느 강연장으로 젊은이가 찾아와 그의 시나리오를 전하고 갔다. 난생처음 보는 영화 시나리오였다. 제목이 ‘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단숨에 읽어졌다. 아주 잘 다듬어진 한편의 소설이었다. 그림이 쫙 그려졌다. 시나리오 속에 김용탁이라는 시 강사가 나와 내 이름과 비슷해서 혼자 웃었다.

왜 나한테 시나리오를 주었을까. 며칠 후 서울 가는 길에 그의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시’ 시나리오 이야기가 나왔다. 주인공인 최미자 역을 누구로 했으면 좋겠냐고 그가 나에게 물었다. 김혜자 김혜숙 고두심 윤여정 씨가 머릿속에 잠깐 머물다 갔지만 모두 이미지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모르겠다며 누군데 하고 물었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빙긋이 웃으며 윤정희 씨라고 했다. 나는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윤정희 씨가 있었구나. 절묘했다.

그런데, 시집도 안 팔리고 사람들이 시를 읽지도 않는데 영화 ‘시’를 볼까. 그랬더니 그러니까 시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시로 물어보고 시로 고민해 보자고 했다. 그러더니 나에게 말했다. 오랫동안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았으니 이제 은막에 데뷔(?)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나는 농담 말라고 하며 웃었다. 나는 무책임한 영화 관객일 뿐이라고 했다.

“세상을 시로 묻고 고민해봅시다”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시나리오 속의 김용탁이라는 이름이 번개처럼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대한 고민이 늘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듯이 나도 갑자기 햄릿이 됐다. 이 일은 그냥 한번 해 보는 초등학교 학예회가 아니지 않은가. 이창동 감독이 어떤 감독인가. 한 번의 영화 출연으로 영화배우를 만들어버리는 감독이 아닌가. 이창동 감독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는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안 돼야. 나 못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나는 완강하게 못한다고 했다. 내가 계속 못한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할 수 있으면 돼요.”

그가 얼마나 신중하게 생각을 한 끝에 부탁을 했을까. 신중함이 짙게 묻어왔다. 그는 거장이 아닌가. 한번 해 본 말이 아닐 것이다. 며칠 고민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말이다. 무슨 일이든 안 하려고 마음먹으면 고민 같은 건 안 한다. 하려는 생각이 있으니 고민이 생긴다. 해보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다가 다시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어떤 때는 두 가지 생각이 팽팽하게 맞서 머리가 아팠다. 결정을 못하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떻게 하기로 했냐는 질문이었다. 그의 물음에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보겠다고 했다. 엉겁결이었다. 말해 놓고 나는 머리가 띵하고 머릿속이 캄캄했다. 대본 속에 나오는 대사를 외우기가 정말 어려웠다.

추석날 영월에 갔다. 일주일간 영화를 찍었다. 때론 힘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보다 힘이 더 들 그를 생각했다. 윤정희 선생이 모니터를 보고 난 후 나를 칭찬했다. 나는 괴롭고 감독은 말이 없었다. 그가 스크린에 쓰고 싶은 시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강퍅한 세상에, 모든 가치가 함몰된 이 뻔뻔한 세상에 던져놓고 싶은 한 편의 시 때문에 그는 괴롭고 나는 시인으로서 고통 속을 헤맸다.

나는 잠 못 든 밤, 달 뜬 동강 가를 서성였다. 달빛에 죽고 사는 강물을 바라보며 괴로워 잠 못 들던 젊은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시절 강물은 늘 캄캄한 어둠을 뚫고 흘러갔다. 시가 이렇게 나를 다시 괴롭히다니. 내가 그동안 쓴 시는? 우리가 쓰는 시는? 삶은? 달빛은? 삶과 죽음은? 촬영 내내 나는 수도 없이 많은 NG를 냈다. 그동안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던 나의 말이 나를 부자유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감독에게 내가 늘 물은 말은 “그런데, 나도 스크린에 얼굴이 크게 나와?”였다.

고통의 일주일이 남긴 깨달음

왠지 두려웠다. 시사회장에서 나는 영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전주에 와서 영화를 다시 보았다. 산 사이를 빠져 돌아 나오는 강물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갈 밭 위를 지나가는 자글거리는 물소리가 나의 일상 속의 일을 건들며 흘러갔다. 고통이 축제가 되고 시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시가 아니라, 우리가 버린 것이 시가 아니라, 우리가 죽인 것이 시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한 것이 실은 나였고 우리라는 그 물소리가, 주인공 미자가 죽은 여중학생을 따라간 물길이 아픈 시의 길이라는 점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진실의 통로가 막히면 삶은 고통이 된다. 시가, 아니 우리가 잃어버린 점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질타는 이렇다. “시 같은 건 죽어도 싸.” 죽어도 싸다는 말은 시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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