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명건/‘천도 논란’과 언론의 책임

  • 입력 2004년 6월 21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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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29일 오후 4시38분 국회 본회의장. 정부가 제출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법안’이 상정된 뒤 의원들의 토론이 시작됐다. 토론에는 의원 4명만 나섰다.

먼저 민주당 이희규(李熙圭) 의원이 “수도 이전이 아닌 엄연한 천도(遷都)”라며 법안 통과에 반대했다. 이어 토론에 나선 한나라당 전용학(田溶鶴), 민주당 김경재(金景梓), 열린우리당 김택기(金宅起) 의원은 찬성 주장을 폈다.

표결에 부쳐진 법안은 찬성 167, 반대 13, 기권 14표로 통과됐다. 법안처리에는 3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로부터 6개월이 지난 21일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대표는 “한나라당이 충분한 검토 없이 법안을 통과시켰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에 앞서 당시 한나라당 최병렬(崔秉烈) 대표의 한 측근의원은 10일 당 운영위에서 “충청권을 의식해 법을 통과시킨 것이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최근 본보를 포함해 각 언론은 한나라당의 이런 ‘오락가락’ 행태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사실 수도 이전이 아니라 천도가 아니냐는 논란은 법안통과 당시는 물론 2002년 9월 당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가 대선공약으로 ‘신행정수도 이전’을 내걸었을 때 이미 불거졌던 사안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 솔직히 표를 의식한 정치공방 정도로 여겼거나 ‘설마 쉽게 실행되겠느냐’는 안이한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천도 논란이 새삼 부각된 것은 정부가 이달 초 “입법 사법부까지 옮겨간다”고 밝힌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 정도(定都) 이후 610여년 만에 이뤄지는 대역사를 여야가 치열한 고민 없이 담합 처리하는 과정을 언론이 제대로 비판·감시하지 못한 책임이 묻혀질 수는 없다.

본보가 14일부터 게재한 ‘천도 논란’ 심층기획은 이처럼 언론 본연의 역할을 소홀히 한 데 대한 뒤늦은 자성(自省)의 산물이다. 그나마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때’라는 격언을 되새기며 앞으로 감시견(watchdog)의 역할에 더욱 충실할 것을 다짐한다.

이명건 정치부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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