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영화파일]'진정한 영웅'은 따로 있다…‘트로이’의 에릭 바나

  • 입력 2004년 6월 3일 17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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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워너브라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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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트로이’하면 브래드 피트와 올랜도 블룸밖에 얘기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를 보기 전의 일이다. 극장 문을 나설 때면 ‘트로이’의 진정한 영웅, 가장 매력적인 스타는 전혀 다른 인물로 바뀌게 된다. 트로이군을 이끄는 헥토르 역의 에릭 바나다.

에릭 바나, 곧 헥토르는 영화 속에서 멋진 말만 골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그리스 연합군을 전방에 두고 헥토르는 자신의 소규모 정예부대 앞에 선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친다.

“전투에 임할 때 나에겐 원칙이 있다. 단순한 원칙이다. 신을 섬기고 내 여자를 지키며 조국 트로이를 사랑하라!”

신을 섬기라는 둥 조국을 사랑하는 둥의 말은 그저 그렇게 들리지만 ‘너의 여자를 지켜라’라는 말에는 왠지 ‘악센트’가 느껴진다. 그런 그의 선동에 끌려 어디든 나가 몸이 부서져라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내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남성 우월주의일뿐이라고?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종 ‘마초(macho)’적 남성은 한껏 매력을 풍기기 마련이다. 세상에 평등주의자, 여권론자뿐이라면 그것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바나의 혈통 혹은 출신을 따지는 것은 다소 복잡한 일이다. 그의 본명은 에릭 바다디노비치. 이름으로도 알 수 있듯 그의 핏줄은 유럽, 그것도 동유럽에서 왔다. 아버지는 크로아티아, 어머니는 독일 쪽이다. 태어나기는 호주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성장해 배우로 성공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얘기하면 러셀 크로나 니콜 키드먼, 나오미 와츠처럼 바나 역시 ‘호주산’ 할리우드 배우인 셈이다.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을 하지 못하고 비디오 출시로 직행했지만 바나가 영화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호주 영화 ‘차퍼’부터였다.

차퍼는 ‘도끼나 칼 등으로 뭔가를 써는 사람’을 뜻한다. 살벌한 제목만큼 영화도 잔혹해서 정말 피와 살점이 튀긴다. 잔인하고 폭력적 충동에 사로잡힌 한 사이코 남성의 엽기살인 행각을 그렸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그 인물이 바나일까 눈을 의심하게 되는데 ‘트로이’나 전작인 ‘헐크’에서처럼 마르고 똘망똘망한 이미지로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차퍼’에서 바나는 두 배 가까이 몸을 불리고 덥수룩한 수염에 입에 욕을 담고 살아가는 ‘인간 쓰레기’로 나온다.

지나치게 리얼한 그의 연기 때문에 감방 안에서의 신들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였다. 그는 이 영화로 호주영화평론가협회가 주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이 영화 한편으로 할리우드의 내로라 하는 감독들로부터 잇따라 러브 콜을 받는다.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 대만 리안(李安) 감독의 ‘헐크’, 볼프강 피터슨의 이번 작품 ‘트로이’까지.

그렇다고 바나가 브래드 피트처럼 특A급 배우는 아니다. 앞으로도 조각미남 배우들처럼 2000만∼3000만달러의 개런티를 받는 배우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A급 연기자로 상당 기간 할리우드에 머물 가능성이 높은 배우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바나가 ‘트로이’에서 주목받은 것은 충분히 예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비극적 영웅의 모습을 소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금 딱 바라는 영웅의 이미지 그대로다. 의연하고 떳떳하며 품위를 지키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전쟁 영웅. 요즘엔 정말 그런 사람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니까.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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