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왜 고구려史 노리나]<4>국제정치학적 분석

입력 2003-12-04 18:35수정 2009-10-10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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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던 호태왕(광개토대왕·375∼413)의 업적을 기록한 호태왕비. 1775자의 비석기록은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와 정세를 담고 있어 중요한 연구자료로 평가된다. 중국 지린성 지안시는 1982년 비각을 세운 데 이어 올해 이 비각에 방탄유리를 둘러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대비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규정하는 국책연구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중국이 지난해 유네스코가 북한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것을 방해한 것도 심상찮아 보인다. 우리 정부 당국자도 공개적으로 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할 정도다.

그러면 왜 중국은 고구려사에 집착하는가? 국제정치와 외교사적 시각에서 보면 중국의 만주(滿洲)에 대한 ‘역사적 불안감’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동북지역으로 불리는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성 일대는 중국 역사에서 하나의 공백이었다. 지난 세기 초까지만 해도 중국 안에서는 이 동북3성을 ‘관외(關外)’라고 불렀으며, 이와 대비해 스스로를 ‘관내(關內)’라고 했다. 만주는 중국의 ‘밖’이었던 것이다. 만주는 버려진 황무지, ‘대황(大荒)’이었다. 만주가 중국으로 편입된 것은 중국이 만주의 지배를 받게 되는 청(淸·1616∼1912) 건국 이후의 일이니 역사적으로 보면 만주는 ‘신생 중국’인 것이다.

게다가 만주는 조선과 ‘중복 공간’이었다. 1712년의 ‘백두산정계비’와 1909년의 ‘간도협약(間島協約)’이 문제가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 만주는 일본과의 ‘분쟁 공간’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족인 청의 마지막 황제를 이용해 만주를 중국과 분리시켰다.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의 ‘고구려 열광’도 이러한 중국인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을 수 있다. 그러나 ‘동북공정’을 남북통일과 소수민족 독립에 대한 중국측의 대응으로 보는 것은 물증도 없고 우리에게 도움도 되지 않을 듯하다.

‘중화(中華)’에서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가 다시 ‘용’으로 승천한 중국의 민족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존적’이고 ‘방어적’일 수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역사적 불안감’의 표출이면서 ‘공격적 정책’이 아니라 ‘방어적 정책’일 수도 있겠다.

그러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첫 번째 시나리오는 ‘외교적 대응’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외교문제로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한일 역사 문제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한일 역사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현대사이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은 여전히 고대사 연구일 뿐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상호주의적 대응’이다. 즉, ‘동북공정’에 필적할 만한 연구 프로젝트를 출범시키는 것이다. 필요한 대응으로 보인다. 단, 중장기적이면서 공정한 안목으로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민관협동’도 좋고, ‘국제적 공동연구’도 바람직하고, ‘남북공조’도 가능하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포용적 대응’이다. ‘역사와 지리 교과서 개정을 위한 독일-폴란드 위원회’를 벤치마킹한 ‘한중 역사공동위원회’를 제안하는 것이다. 독일-폴란드 사이의 이 위원회는 1970년 양국 유네스코 위원회가 발의한 이후 1976년 4월 권고안 편집을 마무리했다. 양국 민족의 기원에서부터 독일의 폴란드 병합 등 난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성공적으로 권고안을 제출했고, 양국은 교과서를 수정했다. ‘포용적 대응’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해와 관용의 정신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성숙한 한중관계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양기웅 한림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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