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이슬람과의 대화]개혁-보수 공존 이란

  • 입력 2001년 1월 14일 19시 03분


이란 수도 테헤란 북쪽에 위치한 테헤란 대학. 매주 금요일 아침 이 곳은 어김없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오전 10시부터 대학 광장에서 열리는 정치 지도자들의 연설을 듣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다.

지난해 12월8일 금요일. 이날 연설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최대 이벤트’였다. 연설자는 바로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 97년 취임한 그는 보수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혁 정책을 추진해 이란 정치무대에 새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테헤란에는 겨울비가 거의 내리지 않지만 이날은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연설장은 9시경에 이미 발디딜 틈 없이 꽉 찼다. 광장에 간이 천막이 쳐졌지만 청중의 절반 정도는 천막 밖에서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연설을 들었다. 청중은 1만명이 넘어 보였다.

하타미 대통령의 연설은 자신의 개혁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는 일종의 ‘자기 반성’이었다. 수많은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능력 부재를 개탄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의 반성은 군중을 열광시켰다.

연설을 듣기 위해 3시간을 달려 에스파한에서 왔다는 열혈여성 서러 샤리피안(20·비서)은 “그가 당선된 후 여성들에게는 화장을 하고, 연인들에게는 공공 장소에서 손을 잡을 수 있는 ‘사소한’ 자유가 허용됐다”면서 “사사건건 보수파의 반대에 부닥치는 대통령이 정말 측은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후인 12월15일 다시 테헤란 대학을 찾았다. 이번에는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최고 종교지도자 아야툴라 알리 하메네이가 연단에 섰다. 개혁과 보수를 대표하는 두 지도자가 일주일 간격으로 대중 연설에 나설 정도로 최근 이란의 정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날은 날씨가 화창했으나 군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줄어든 청중보다 더 눈에 띈 것은 달라진 구성원들이었다. 하타미의 연설 때 많이 보였던 차도르를 쓴 여성과 젊은이들은 거의 사라지고 이슬람 신앙심의 상징인 긴 턱수염을 기른 중장년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메네이는 대학생들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대학이 정치세력과 연계하고 있다”면서 “학생들은 본분을 지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99년 여름 학생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던 테헤란대 도서관 앞에 모여있는 대학생들에게 “왜 하메네이의 연설을 듣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하메네이는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면서 “보수파는 단지 군 경찰 언론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파에 대한 불만이 젊은 층과 여성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무원으로 일했던 택시 운전사 메이사이드(40)는 “공무원 월급으로는 TV 한 대 장만할 수 없다”면서 “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 나라는 멈춰버렸다”고 말했다.

변화를 바라는 이란 국민의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의회였다. 13일 의사당을 찾았을 때 의원들은 농지개발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사회를 보는 부의장은 하타미 대통령의 동생이자 개혁세력을 주도하는 이슬람참여전선당(IIPF)의 당수인 모하마드 레자 하타미였다. 재선 여성의원인 엘러히 쿨러히(45)는 “2월 선거에서 개혁파가 압승을 거둔 뒤 의회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면서 “민의를 무시하는 정치인은 살아남기 힘들게 됐다”는 말로 이란 정계의 변화를 요약했다.

최근 이란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6월 대선에 하타미 대통령이 다시 출마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기자가 이란에 머문 열흘 동안 하타미 대통령의 출마 관련기사가 매일 현지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지난해 4월 보수파에 의해 강제 폐간당한 루즈너메 에즈테서디(경제신문)지의 압버스 사할히스 국장은 “70%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하타미 대통령의 지지도가 현재 90%까지 올랐다”면서 “그가 출마하면 당선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하타미에 대한 비판이 있기는 하다. 일부 지식인들은 “하타미 대통령이 보수파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불만을 털어놓았다. 종교 세력이 하타미 대통령의 개혁 정책을 이용해 국민의 급진적인 민주주의 요구를 잠재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란 기자협회 부회장인 아르간데 푸르(35)는 “하타미 대통령이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면 오히려 보수파들이 당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테헤란 시민들은 혁명보다는 개혁을 원하고 있었다. 중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한다는 레자 골라미(32)는 “지금 상황이 답답하지만 그렇다고 사회가 완전히 바뀌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타협적인 태도 속에는 지난 20년동안 이슬람 혁명, 미 대사관 인질사건, 미국의 경제제재, 이라크와의 전쟁 등 큰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란 국민이 느낀 피로감과 두려움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이란부통령 에브태카르"여성사회진출 활발…의원 16%차지"▼

1980년 수십명의 테헤란 대학생이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했다. 이들을 이끈 5명의 지도자 중 대외연락을 담당했던 홍일점 여학생 마수메 에브테카르. 20년이 흐른 지금 그 여학생은 이란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 돼 이란 정치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이란 최대 신문 케이한 타임스에서 정치담당 기자로 일했던 에브테카르 부통령(41)은 당시 편집국장이던 하타미 대통령의 권유로 8년 전 정치에 입문했다. 지난해 12월 16일 집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하타미 대통령의 개혁 정책으로 이란의 대외 이미지가 크게 개선됐다”고 강조했다.

―하타미 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 정책의 기본 골격은 무엇인가.

“개혁 정책은 국민 기본권 보장, 경제성장, 대외협력 강화 등 3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타미 대통령 취임 후 독일 프랑스 중국 일본 등과 관계가 개선됐으며 올해부터 비석유산업 개발에 중점을 둔 제3차 경제개발계획을 진행 중이다.”

―부통령으로서 무슨 일을 담당하고 있는가.

“대통령 밑에 5명의 부통령이 있다. 나는 환경을 담당한다. 급속한 석유자원 개발로 자연 환경훼손이 심각해 하타미 대통령 취임과 함께 환경 부통령직을 신설했다.”

―이란은 여성이 부통령직까지 오를 정도로 사회 진출이 활발한 반면 여성에게 차도르 착용을 의무화하는 몇 안되는 중동 국가 중 하나이다. 이란 여성의 지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차도르는 이란의 문화이자 종교이다. 이란 여성이 차도르를 쓴다고 해서 제약을 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학생 중 62%가 여성이며 국회의원 217명 중 35명이 여성이다. 2월 총선에 입후보한 6000명의 후보자 중 7.2%인 420명이 여자였다.”

―아직도 미국은 이란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있다. 과거 미대사관 점거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한명으로서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미국이 먼저 변하지 않는 한 양국 관계는 진전될 수 없다. 이란에 대한 미국의 경제 제재는 미국 회사는 물론 다른 나라 기업이 이란과 교역하는 것까지 막고 있다. 미국 행정부가 바뀌면 관계 개선이 조금 앞당겨질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스카프 두르고 취재…차도르 이면엔 자유 숨쉬고▼

기자는 이란 취재를 위해 서울 주재 이란 대사관에 비자 신청 서

류를 냈다가 처음에는 퇴짜를 맞았다. 서류에 붙인 사진이 문제였다. 대사관 직원은 “이란에 입국하는 여성은 차도르를 써야 한다”면서 “스카프를 두르고 찍은 사진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지난해 12월 8일 비행기가 테헤란 땅에 닿는 순간부터 기자는 서울에서 가져간 스카프를 두르고 다니며 취재를 해야 했다. 레스토랑에서 잠시 스카프를 벗었더니 지배인이 달려와 스카프를 두르든지 아니면 나가 달라고 요구했다. 차도르는 얼굴을 포함해 온몸을 가리는 검은 천을 말한다. 그나마 이슬람 혁명 이후 얼굴만 가리는 ‘미니 차도르’인 ‘헤잡’이 허용돼 대부분의 젊은 이란 여성들은 이것을 두르고 다녔다.

여성은 이외에도 갖가지 제약을 받는다. 기자를 안내한 한국인 가이드는 “공공 건물에 들어가거나 정부 관리를 만날 때는 화장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비교적 자유롭다는 테헤란대에서 만난 대학생들조차 기자에게 외투 앞단추를 풀고 다니지 말라는 충고를 던졌다.

그러나 차도르 속 이란 젊은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란의 젊은 세대들은 표현의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찾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 꿈이다. 최근 한국과의 경제교류가 늘면서 한국도 이란 젊은이들이 가고 싶어하는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테헤란행 비행기에서 만난 이란 남자는 “한국 대사관에 여러 번 비자 신청을 했는데 거부됐다”며 “초청장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망설임도 없이 기자에게 했다. 마수메 에브테카르 부통령을 만나기 전 가방 수색을 하며 살벌하게 대하던 경호원도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 기자에게 “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이란 국회에서 만난 여기자 로밥 파르하디(25)는 “대부분의 테헤란 시민들은 코란을 읽는 프로그램으로 채워진 이란 TV를 제쳐두고 위성방송을 통해 유럽과 미국의 오락 프로그램을 시청한다”고 말했다.

겉모습이 이란인들의 전부는 아니었다.

<테헤란〓정미경기자기자>micke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