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조광조]『개혁 표상-이상주의자』평가

  • 입력 1997년 9월 20일 07시 10분


개혁가들의 생애에 대한 평가가 그러하듯 조광조에 대한 평가 역시 두갈래다. 조광조가 가고 세월이 흐른 뒤 숙종은 눈물어린 추도시를 통해 그의 개혁정신을 기렸다. 「연려실기술」의 한 대목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의연함을 칭송한다. 조광조가 귀양간 지 얼마 안돼 사사(賜死)하라는 명이 내려오자 그는 『임금이 신에게 죽음을 주시니 반드시 죄명이 있을 것인즉 청컨대 그것을 공손히 받들고 죽겠노라』고 말하고 뜰아래 내려가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한 다음 엎드려 전지(傳旨)를 받았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할 것이요, 두껍고 무겁게 하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그러나 조광조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이상주의자였으며 그의 개혁은 실패한 것이란 평가도 뒤따른다. 신복룡(申福龍)건국대교수의 경우 그 실패의 원인을 △현실과 이상의 거리 △세상을 보는 단순한 시각 △살아남는 지혜 부족 등에서 찾고 있다. 한 예로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등의 엄청난 「질주」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개혁가에게 절의와 죽음만이 최고의 가치요 미덕일 수는 없다. 그 죽음은 늘 엄청난 반동의 광풍을 부르고 생채기를 남기므로.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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