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깨문 지훈이… 왜 그랬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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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동아일보-채널A 공동 연중기획]
<2>어릴수록 더 위험한 언어폭력

《 지훈이(가명)가 어느 날 친구를 깨물었다. 모범생으로 칭찬이 자자하던 지훈이의 행동에 주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지훈이를 상담했더니 7년 전 생긴 상처가 문제라는 진단이 나왔다. 초등학교 시절 지훈이는 친구들의 ‘나쁜 말’ 폭력에 시달렸다. 그로 인한 상처가 흉터로 남아 지워지지 않은 채 ‘시한폭탄’처럼 자리 잡고 있다가 어느 날 폭발했다는 것이다.

지훈이는 예외적인 경우일까. 그렇지 않다. 도처에 깔린 나쁜 말들은 이미 우리의 아이를 노리고 있다. 나쁜 말은 아이들의 뇌에 상처를 준다. 그로 인해 정서와 성격도 변화된다.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말에 많이 노출될수록 공격적인 성향은 강해지는 반면, 어휘력이나 단기 기억력 등은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은 연중기획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에서 나쁜 말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들여다봤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팀과 공동으로 실험을 진행해 나쁜 말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각인되는지, 그래서 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진단했다. 또 초중고교로 올라갈수록 아이들의 나쁜 말 수준이 어떤 방식으로 독해지고, 성적인 욕설과 어떻게 결합되어 가는지 분석했다. 》

열살때 겪은 나쁜말 상처, 흉터로 남아 기억력 좀먹어

다들 놀랐다. 반응도 비슷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훈이(가명)가?”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지훈이는 얌전한 아이였다. 누가 뭐라 해도 미소만 짓는, 화내는 법조차 모르던 아이. 성적은 중상위권, 집안 형편도 넉넉했다. 키가 크고 농구도 아주 잘했다. 도무지 구김살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아이였다. 그래서 모두 좋아했는데…. 그런데 그런 지훈이가 사고를 쳤다. 친구의 팔을 깨물었다. 그것도 3명이나. 잇자국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날 만큼 세게 깨물었다. 하지만 이유를 듣고 보니 심각한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소한 언쟁 도중 친구들이 약간 비아냥거렸고, 지훈이는 순간 분을 참지 못했다.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지.’ ‘사고 치기 전, 엄마한테 혼나서 속이 상했나.’

모두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훈이는 가슴속에 진작부터 ‘시한폭탄’을 키우고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남들은 잘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훈이는 불안하고 우울한 증세를 자주 보였다. 잠을 설친 적도 많았다. 단지 해맑은 미소와 조용한 성격이 이런 그림자를 가리고 있었을 뿐.

대체 어디서 온 불안함일까. 상담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무려 7년 전 받은 상처였다. 그게 치유는커녕 곪아서 터진 거였다.

지훈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들로부터 들었던 단지 하나의 별명이 문제가 됐다. 눈치가 없다는 이유로, 눈치 제로를 줄여서 친구들이 붙여준 ‘눈제’란 별명. 심한 욕설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훈이에겐 삶을 뒤흔든 언어폭력이었다.

지훈이가 입만 열면 친구들은 키득거렸다. 눈제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면서. 물론 친구들은 자신이 지훈이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대신 당사자인 지훈이만 너무 아팠다. 항상 위축됐다. 하지만 모두 그렇게 부르는데 누구 한 사람에게만 따질 수도 없었다. 답답하고 싫었지만 이를 해결하기엔 너무 설익은 나이.

결국 그냥 무방비로 공격에 노출된 채 상처만 받았다. 그리고 그 상처는 안에서 곪고 또 곪아 결국 지금 가슴속에 품은 시한폭탄의 뇌관이 됐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의 마틴 타이커 교수팀은 어린 시절 또래들로부터 언어폭력을 당한 18∼25세의 성인들을 관찰한 연구 결과를 2010년 발표했다.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현재의 불안함, 우울증, 적대감, 정신분열, 약물 남용 등의 증상이 과거 언어폭력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 뇌를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어 들여다봤다. 성폭력을 당한 아동들에게서 얻어지는 결과와 유사한 이미지가 보였다. 이에 대해 이재헌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어릴 때 언어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뇌 일정 부위인 신경다발과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또 우울증 발현 가능성도 크게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뇌의 앞부분인 전두엽은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을 담당한다. 전두엽은 ‘감정의 뇌’에 해당하는 변연계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쁜 말이란 강한 자극이 지속되면 전두엽이 그 통제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다. 김영보 가천대 의대 뇌과학연구소 교수는 “뇌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시점에 감정에 휘둘리면 상처 받기 쉽다. 충동성과 공격성이 제어하기 힘든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쁜 말이 그 자체로 해롭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엘마 게이츠는 사람들이 말할 때 나오는 미세한 침의 파편을 모아 그 침전물을 분석했다. 그랬더니 평상시엔 무색이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땐 분홍색, 화를 내거나 욕할 땐 짙은 갈색으로 나타났다. 더 놀라운 건 갈색 침전물을 실험용 흰쥐에게 투여했더니 금방 죽었다. 말 그대로 ‘독설’인 셈. 이에 게이츠 교수는 이 갈색 침전물에 ‘분노의 침전물’이란 이름을 붙였다.

나쁜 말에 익숙해져 내성이 생기면 더 무섭다. 특히 유아기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점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한편, 그 자극을 받아들여 습관처럼 각인시키는 속도도 매우 빠른 시기다. 홍진표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교수는 “나쁜 말 때문에 고통 받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통에 길들여져 그 고통조차 못 느낄 때”라면서 “유아기 때부터 언어폭력에 익숙해지면 그 교정을 위해 평생이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강조했다.

신진우 niceshin@donga.com·곽도영 기자
#언어폭력#단기 기억력#어휘력#나쁜 말#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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