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과 각별한 인연 화제

  • 뉴스1
  • 입력 2018년 11월 1일 11시 19분


덩샤오핑, 김용을 대만 통일의 메신저로 이용했었다

반팔 차림의 덩샤오핑이 정장차림의 김용을 환영하고 있다. 1981년 여름  베이징이다. SCMP 갈무리
반팔 차림의 덩샤오핑이 정장차림의 김용을 환영하고 있다. 1981년 여름 베이징이다. SCMP 갈무리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이 별세하자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과의 각별한 인연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1일 보도했다.

덩샤오핑은 정보 요원을 홍콩으로 보내 김용의 소설을 구해오도록 할 정도로 김용의 팬이었고, 덩샤오핑은 전중화권에 많은 독자를 가진 김용을 대만 통일의 전도사로 활용할 정도로 신임했다고 SCMP는 전했다.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7월 18일이었다. 김용은 베이징을 방문했고, 덩이 그를 인민대회당으로 초청했다.

덩샤오핑은 김용을 처음 만났을 당시 “당신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며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다”고 환영했다.

중화권 최고의 권력자와 중화권 최고의 ‘펜’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들은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공통점이 많았다. 문화혁명 당시 덩샤오핑은 아들 덩푸팡이 불구가 되는 등 갖은 시련을 겪었고, 김용은 홍콩으로 망명했지만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문화혁명 당시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특히 아버지는 사형을 당했다.

덩샤오핑이 문화혁명 시절 고난을 겪고 있을 때, 김용은 홍콩 명보의 주필로 문화혁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칼럼을 여러 차례 썼다.

김용은 특히 덩샤오핑 같은 실용주의자가 집권을 해야 한다는 칼럼을 썼고, 덩샤오핑이 복권되기 직전인 1976년 덩샤오핑의 복권을 예견했다. 김용의 예언대로 덩샤오핑은 1977년 복권됐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에 나서자 김용은 자신의 칼럼을 통해 개혁개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 같은 유대를 바탕으로 둘이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김용은 1981년 베이징을 방문했고, 덩샤오핑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도중 덩샤오핑은 김용에게 대만과 통일의 메신저 역할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김용은 대만에서도 매우 인기 있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홍콩이 아니라 대만에 일국양제를 써먹을 요량이었다. 덩은 김에게 일국양제의 요지를 설명해 주고 자신의 뜻을 대만측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용은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대만 방문에 나섰다. 김용은 대만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만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김용은 1973년 대만을 방문해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를 직접 만났다. 당시 장제스는 병석에 누어 있어 만나지 못했지만 차기 총통이 되는 장징궈와 직접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대만과도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덩샤오핑은 이런 김용의 이력을 알고, 대만을 방문해 일국양제의 개념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물론 김용의 임무는 성공하지 못했다. 대만은 일국양제를 또 다른 통일전선전술이라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화는 김용이 중화권 최고의 지도자 덩샤오핑과 막역한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특히 홍콩 명보의 주필로 있으면서 스스로를 개혁개방의 전도사라고 자임할 정도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덩샤오핑 또한 김용의 열렬한 독자였다. 최고 지도가가 된 덩샤오핑은 서류를 검토할 것이 많았다. 항상 서류에 파묻혀 살았다. 그에게 김용의 무협소설은 머리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인 읽을거리였다.

덩샤오핑의 딸 덩룽은 “아버지의 침대 머리맡에는 항상 김용의 소설이 놓여있었다”며 “아버지는 소설을 읽으면서 잠에 들곤 했다”고 회고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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