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위기의 재촉발 여부로 관심을 끌어온 이탈리아 총선 결과 경제 개혁을 지속하겠다고 공언한 중도 좌파 민주당이 예상대로 상·하원에서 제1당에 올랐다.
25일 오후 3시(한국 시간 오후 11시) 이틀간 투표를 마치고 발표한 스카이TG 방송 출구조사 결과 피에를루이지 베르사니의 민주당이 하원에서 34.5%로 1위에 올랐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끄는 자유국민당은 29%, 정치개혁 세력을 자처해온 ‘5성(星)운동’은 19%를 얻어 그 뒤를 따랐다. 마리오 몬티 총리가 대표로 나선 중도연합은 9.5%로 4위에 그쳤다. 상원 득표율 예상치는 민주당부터 차례대로 37%, 31%, 16.5%, 9%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베르사니 대표가 총리에 오르고 중도연합과 군소정당인 시민혁명 등이 가세하는 좌파연정이 모색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몬티 총리가 연정에서 경제를 총괄하는 재무장관을 맡을 것인지도 관심사다. 연정 구성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국내외 금융 시장의 첫 반응이 어떨지 주목된다.
○ “변화 없을 것, 새 정부 오래 못 가”
민주당이 연정에 성공하더라도 압도적 과반수를 갖지 못하면 불안한 정국이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로마에서 투표한 변호사 마르타 씨는 “비관적이다. 우리는 다시 정치적 분열에 직면할 것이다. 새 정부가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많은 유권자들은 새 정부가 높은 실업률과 막대한 정부 부채, 장기간의 경제 침체를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민주당은 현 정부의 개혁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노조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고 몬티 총리에 대한 국민 여론도 좋지 않은 만큼 지속적인 긴축과 민영화 정책을 펴기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또 민주당은 유럽연합(EU)에 일자리 늘리기와 성장정책을 보완해야 한다며 긴축 일변도 정책에 반대하고 있어 중도연합과의 공조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다.
긴축 반대와 대대적인 감세를 외쳐온 자유국민당이 막판에 크게 선전하며 2당에 오르면서 수시로 새 정부 정책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게다가 중앙 의회에 처음 진출하는 5성운동은 단번에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게 됐다. 5성운동은 기성 정당과의 연대는 절대 없다고 강조했으나 주요 정책의 의회 승인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따라 연정의 생사가 오락가락할 개연성이 커졌다.
○ 찻잔 속 태풍이냐, 구제금융이냐
현재 이탈리아 경제는 엔진이 완전히 멈춘 상황이다. 지난 10년간 성장률은 연평균 0.3%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에서 아주 부진한 국가 중 하나이다. 지난해에는 ―2.2%의 성장률을 기록해 전후 최악의 경기침체기를 겪고 있다. 청년실업률은 37%에 이른다.
2011년 11월 취임한 몬티 정부는 유로존의 지지 속에 공공기관 민영화, 공공 서비스 민간 개방, 교육과 의료 등 사회 복지비와 지역 보조금의 삭감, 세금 인상, 연금 개혁 등을 통해 지난여름 한때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로까지 내몰린 이탈리아에 대한 시장의 불신을 줄여왔다.
하지만 선거 결과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지난해 9월 재정위기국의 채권을 무제한 사들이겠다는 유럽중앙은행(ECB)의 발표 이후 이탈리아와 스페인 상황에 악영향을 끼칠 만한 변수들이 있었지만 영향을 미치지 않은 데다 유로 위기가 바닥을 쳤다는 분석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 5星운동, 기성정치 불신 업고 돌풍 ▼
코미디언 출신이 2009년 창당… 인터넷 통해 확장 ‘伊 나꼼수’
5성(星)운동의 약진은 이탈리아 국민이 정치권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과 모순을 그대로 드러낸다.
5성운동은 모든 기성 제도권 정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다. 희극인 출신으로 거리 공연을 통해 인기를 모은 베페 그릴로 씨가 2009년 직접 민주주의의 확대를 기치로 내걸고 출범시켰다. 이들은 기성 정당은 물론이고 노동조합, 좌파와 우파 모두를 비판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을 부르짖었다. 지난 두 차례 지방선거에선 돌풍을 일으키며 시장과 시의원을 배출했으며 국내에는 ‘이탈리아판 나꼼수’로 알려지기도 했다. 인터넷을 통해 세력을 급속히 확산하고 있고 젊은 유권자들과 좌파 지지층에서 인기가 높다.
5성운동은 선거에서 반(反)부패와 반유럽연합(EU), 유로존 탈퇴, 국가 채무 이행 거부, 주 근로시간 20시간으로 축소, 초등학생 전원에게 태블릿PC 무상 제공, 교육과 보건 완전 무료화 등 거의 실현이 불가능한 급진적인 포퓰리즘적인 공약을 내걸었다. 그럼에도 적잖은 국민의 지지를 받은 것은 대안 정당으로 인정받았다기보다는 기성 정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워낙 컸던 결과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여하튼 5성운동이 원내 유력 정당으로 부상함에 따라 이탈리아 정치 개혁에 어떤 파장을 부를지 주목된다. 1, 2위 정당 모두 5성운동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