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67)가 마침내 제도권 정치에 발을 내디뎠다. 1988년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지 24년 만이다.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1일 치러진 미얀마 보궐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NLD는 이날 밤 “후보를 낸 44개 선거구 모두에서 승리했다고 확신한다”며 “수치 여사는 82%의 득표율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선거는 총 45개 선거구에서 치러졌으며 수치 여사는 옛 수도 양곤의 남쪽 지역에 있는 카우무에서 출마했다. 자택은 양곤이지만 국제사회에 미얀마의 발전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낙후된 마을을 출마지로 정한 것. 1962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지 50년 만에 국민의 의지가 반영된 사실상의 첫 선거인 이번 보선의 공식 결과는 며칠 뒤 나올 예정이지만 외신들은 NLD의 압승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선거 당일 곳곳에서 투표용지 조작 등 부정선거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선거 감시 활동을 벌인 유럽연합(EU)의 선거관리위원은 “선거의 공정성에 대해 고무적으로 보고 있다. 심각한 부정행위에 대한 보고는 없었다”고 밝혔다.
수치 여사의 앞길에 대해서는 비관과 낙관이 혼재하고 있다. NLD가 압승을 거두더라도 미얀마 전체 정치에 미칠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군부 지명 의원과 군부의 후원을 받는 여당 통합단결발전당(USDP)이 상·하원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의회를 장악한 탓이다.
당선 후 행보에 대해 수치 여사는 선거 전 “군부정권에서 내가 장관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 미국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여러 나라와 균형 잡힌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얀마의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미얀마의 민주화 단계를 1부터 10으로 나눠 본다면, 우리는 1부터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미얀마 민주화가 순조롭게 이행될 경우 차기 총선에서 수치 여사가 1989년 만들었고 현재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NLD가 제1당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간선제인 차기 대통령 선출은 2015년이다.
의원이 된 수치 여사가 재입국을 보장받은 상태에서 해외 방문이 성사될지도 관심사다. 24년간 미얀마를 떠나지 못했던 수치 여사는 “단 며칠, 단 몇 시간만이라도 다른 나라로 여행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혀 왔다. 2월에는 미얀마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려운 시기에 미얀마를 꾸준히 도와준 노르웨이를 가장 먼저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로선 미얀마의 민주화와 개혁 개방이 점진적으로 계속 진행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지난해 3월 취임한 테인 세인 대통령이 수치 여사와 공식 회담을 갖고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 왔고, 이에 미국과 EU가 미얀마 제재를 일부 해제하며 변화에 화답했기 때문이다. 선거 이후 서방 국가들의 미얀마 국영기업에 대한 투자가 논의될 것이라는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수치 여사는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이다. 영국에서 결혼해 살다 1988년 위독한 어머니를 보러 일시 귀국했다 당시 미얀마 군부의 압정에 충격을 받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89년 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1990년 총선에서 NLD가 485개 의석 중 392개를 휩쓸며 압승했지만 군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며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 기간을 연장했다. 그 뒤에도 약 15년 동안 그는 총 3번의 가택연금을 겪었다. 1999년에는 군부의 비자 발급 거부로 미얀마 방문이 좌절된 영국인 남편 마이클 아리스가 전립샘암으로 영국에서 사망했지만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아픔도 겪었다. 당시 영국으로 출국하면 군부가 재입국을 막을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수치 여사는 그 같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화 신념을 지켜왔으며, 199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2002년에는 유네스코 인권상을 받는 등 제3세계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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