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받아온 난방보조금을 앞으로 사회복지단체에 자진 반납하겠다는 영국 부자 노인들의 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고 18일 영국 언론이 보도했다. 정부의 복지예산이 부유한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계층에 집중적으로 지원돼야 한다는 선의(善意)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영국의 난방보조금은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모든 노인에게 일정액씩 나눠주는 것으로 ‘보편적 복지’라는 관점에서 한국 진보세력이 요구하는 무상급식 제도와 일맥상통한다.
보편적 복지를 포기하는 영국 부유층의 이 같은 선언은 자신들에 대한 세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미국-프랑스 부호들의 움직임과 함께 월가 점령 시위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자본주의의 자기정화 노력으로 비치고 있다.
겨울이 유난히 추운 영국에선 지난해에만 2만5400명의 노인이 얼어 죽었는데 이 중 약 3000명은 난방비 부족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었다. 영국 정부는 60세 이상 노인이 있는 모든 가구에 매년 난방비를 지원하고 있는데 올해는 60세 이상 가구에 200파운드(약 36만 원), 80세 이상 가구에 300파운드(약 54만 원)를 각각 지급할 예정이다. 지난해에는 모두 1260만 명이 혜택을 받았다.
문제는 이 돈이 백만장자들에게도 간다는 점이다. 연소득이 10만 파운드(약 1억8000만 원)가 넘는데도 매년 난방비 지원을 받는 노인이 1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해외 거주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 6만5000여 명의 재외국민이 이 혜택을 받고 있다. 특히 이 중 약 3만 명은 겨울이 따뜻한 스페인에서 살고 있다.
올해는 전기료와 가스비가 20%가량 올랐지만 예산 부족으로 1인당 지급액은 지난해보다 최대 100파운드씩 낮아졌다. 모든 국민에게 돈을 나눠 주느라 한 푼이 아쉬운 저소득층에 갈 돈마저 줄어든 것이다.
이에 영국의 일부 부자들은 “난방비 지원이 삭감되는 등 저소득층의 어려움이 커지는 마당에 우리 같은 부자들이 이 돈을 받아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겨울나기’라는 이름의 지원금 반납 운동을 펼치고 있다. 자신에게 오는 지원금을 민간 복지단체에 우편이나 계좌이체로 보내 가난한 계층에 더 많은 난방비가 돌아가도록 하자는 운동이다. 영화배우 헬렌 미렌, 원로언론인 조앤 베이크웰 씨 등 명사 10여 명이 주도하는 이 운동은 60세 이상 기업인 은행가 의사 법률가 등 부호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의 지원금 반납창구 역할을 하는 복지단체 커뮤니티재단네트워크(CFN) 측은 “캠페인을 정계, 연예계에 파급시켜 궁극적으로 연소득 10만 파운드 이상의 가구들이 모두 지원금을 자진 반납하도록 이끄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이 같은 부유층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계기로 영국에선 보편적 복지에 대한 유효성 논란도 커지고 있다. 정부 및 일부 복지단체에선 여전히 “소득수준 등 각종 기준을 세워 복지 대상을 제한하면 외형상 소득은 높아도 실제로는 극빈층인 노인이 지원을 못 받는 등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며 제도 수정을 꺼리고 있다. 또 완벽한 복지국가를 문명사회의 상징으로 여기는 영국인들의 자부심도 아직 상당하다. 그러나 베이크웰 씨는 일간 데일리메일에 기고한 글에서 “얼마 전 록그룹 레드제플린에서 활동한 로버트 플랜트를 만났는데 재산이 8000만 파운드나 되는 그도 60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며 “터무니없는 이 제도에 우린 그저 웃고 말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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