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기자들 ‘통곡의 아이티’ 취재 그 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일 03시 00분


걱정된다
금가는 국제 공조
파병국들 주도권 다툼 날로 치열
구호품 전달-치안 힘써주었으면

아이티에서 뉴욕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열흘이 넘었다. 아직도 TV 화면에서는 아이티 참상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보다 많이 줄기는 했지만…. 뉴욕 특파원인 기자는 아이티 지진 발생 다음 날인 지난달 13일 아이티 옆 나라인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구호활동에 나선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을 따라 육로로 15일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해 18일까지 3박 4일간 현장을 취재했다. 아이티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지금 잘 지내고 있을까.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 아이티 관련 소식을 꼼꼼하게 챙겨 보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구호품 문제다. 아직도 아이티의 이재민들에게 구호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 듯해 걱정된다. 실제 르네 프레발 아이티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구호국들과 아이티 정부 간에 협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구호작업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하니 내 걱정이 기우만은 아닌 것 같다.

기자가 1월 15일 도미니카공화국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10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아이티에 도착했을 때도 이재민들은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는 세계 각국에서 온 구호품이 쌓일 때까지 모아뒀기 때문에 이재민들은 배를 곯았다. 당시 현지 관계자들이 “구호품을 나눠 주다 부족하면 먹을 것을 받지 못한 이재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고, 서로 받으려고 하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당시 구호품이 쌓여 있는 창고나 먹을 것이 있을 만한 곳에는 이재민이 수백 명씩 몰려들었다. 외국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소나피 공단도 마찬가지였다. 소나피 공단은 외국의 구호단체나 자원봉사자들이 유엔군의 보호를 받으며 텐트를 치고 생활하던 곳이다. 음식을 구걸하는 이재민들이 하루 종일 공단 정문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무장한 유엔군은 이들의 출입을 막느라 격렬한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무너진 상점에서 찾은 음식을 놓고 기다란 ‘정글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굶주린 사람들의 눈빛이 눈에 선하다. 먹을 게 부족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게다가 세계 각국이 구호를 핑계로 염불보다 잿밥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아 걱정된다. 미국 유럽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이 앞 다퉈 병력을 증강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카리브 해의 조그만 섬나라 아이티를 두고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뉴스가 사실이 아니길 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계 각국의 민간구호단체나 민간인들의 구호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영화배우 존 트래볼타는 자가용 비행기에 의약품을 싣고 날아갔다고 하지 않는가.

부디 아이티에서 만났던 많은 이재민에게 하루라도 빨리 충분한 구호품이 전달되기를 바란다.

신치영 뉴욕특파원 higgledy@donga.com
안타깝다
줄어든 한국 원조
구호성금 급속하게 줄어들어
복구까진 먼길… 지속적 관심을

한국과 아이티를 오가는 데에는 이틀씩 걸린다. 같은 시간이지만 무게는 전혀 달랐다. 가는 길은 멀고 고달팠지만 ‘어서 현장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짧게만 느껴졌다. 오는 길은 짧고 편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한 비극의 현장 때문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지난달 18일(한국 시간) 버스를 타고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에서 철수를 시작한 지 3시간 만에 도미니카공화국 국경에 도착했다. 아이티를 빠져나오는 데 불과 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쉽고 편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기자는 성공적인 철수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같이 철수에 나선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원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아이티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내 눈에 밟혔다. 아이티로 향하는 버스에서 만난 친구들이 먼저 생각났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러 귀국길에 오른 그들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얘기하며 관심을 호소했다.

포르토프랭스에서 그들과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긴장한 듯 손에 흥건히 배어 있던 땀이 기자의 손도 적셨다. 지금도 손에는 그들이 전한 땀과 온기가 남아 있다. 그들이 아이티에서 꿈에 그리던 가족들과 만났을지…. 간이 병동에서 고통을 호소하던 환자들도 머릿속을 맴돌며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절망 속에서 넉넉한 호의를 베푼 사람들도 많았다. 선뜻 인터뷰에 응하고, 취재를 도와준 수많은 사람과 편의를 제공해준 현지 선교사들까지…. 급히 철수하느라 고마움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헤어진 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귀국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아이티를 향한 우리 시민들의 온정이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기 때문이다. 외국 구호단체 일색이던 아이티 현장에도 우리의 긴급구호활동가, 의료지원단, 소방구조대 등의 파견이 속속 이어졌다. 정부 역시 긴급구호자금을 신속히 지원키로 결정했다. 각종 웹 사이트에는 아이티 국민들을 애도하고, 후원하는 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현지에서 땀을 흘리는 한국인들의 활약도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 ‘국격’이란 말이 새삼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이티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식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굿네이버스 등 구호단체 3곳에 따르면 아이티 지진 이후 첫 주말(1월 15∼17일)에 접수된 성금은 9억 원이었지만 1월 22일부터 3일 동안 모금된 액수는 2억6700여만 원에 그쳤다. 부모를 잃고 집을 잃은 아이티인들의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인 반면 우리의 관심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이티인들은 다가올 여름을 더 걱정하고 있다. 해마다 여름이면 허리케인이 들이닥쳐 큰 수해가 나기 때문이다. 여름을 앞둔 아이티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의 관심도 현재진행형, 아니 ‘미래진행형’이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마음의 무게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미안한다
부족한 의료 지원
열악한 의료시설에 환자 넘쳐나
도움 청하던 간절한 눈빛 못잊어

지난달 22일 떠나기 전 리히터 규모 6.0의 강한 여진(餘震)이 발생했다. 폭력, 강도사건도 있었다. 꼭 가야 하는가라는 망설임이 많았다. 그러나 기자이면서 의사로서 재난지역에서 의료구호활동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세브란스병원, 한국기아대책과 함께 짐을 꾸렸다.

24일 오전 9시(현지 시간) 포르토프랭스 북쪽 코뮈노테 병원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보는 아이티 주민의 눈빛에는 공포와 절망감이 가득했다. 위협적인 시선도 느껴졌다. 병원에선 장총(라이플)으로 무장한 경비원이 통로를 지켰다.

병원 밖까지 환자가 넘쳐났다. 아이들은 부러진 팔과 다리의 염증이 악화돼 생긴 통증을 못 이겨 울부짖었다. 진료를 하고 있을 때다. 네 살이 채 안 돼 보이는 아이가 기자에게 다가와 먹을 것을 달라며 손을 벌렸다. 그 아이는 다음 날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감기약이나 진통제를 달라고 조용히 부탁하는 사람도 많았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으리라. 그들의 요구대로 해줬다. 그래서였을까. 한국의료진을 찾아와 물, 빵, 약을 달라는 현지인이 유독 많았다. 소문이 났나 보다.

병원에선 통역업무를 하는 현지인도 많았다. 병원 안에 있으면 끼니는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들은 통역에 능통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에게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바로 그날로 그들이 쫓겨나기 때문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고 봉사단활동에 익숙해지자 현지인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공포와 절망감 대신에 간절한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이었다. 의료시설이 열악한 데다 넘쳐나는 환자 때문에 더 많은 의료봉사를 할 수 없다는 게 오히려 미안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봉사단이 환자들을 난민촌에서 직접 병원으로 싣고 온 대목이 인상 깊었다. 썩어 들어가는 발과 부러진 팔 때문에 즉각 수술해야 하는 환자들이었지만 병원까지 올 차비가 없어 방치됐던 사람들이었다. 그제야 기자는 난민촌에 천막을 세우고서라도 환자를 찾아내는 진료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병원 밖은 어땠을까. 기자가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는 포르토프랭스 거리가 빠른 속도로 살아나고 있었다. 시내 중심부엔 버려진 시신도 없었고 도로도 정비되고 있었다. 신호등도 작동했다. 길거리엔 좌판에서 빵과 스파게티 같은 음식을 팔았고 신발 옷 과일 등이 활발하게 거래됐다. 하지만 한국의 삼풍백화점 같은 건물 수천 개가 동시에 무너진 듯한 풍경은 여전히 을씨년스러웠다.

정부가 국내 의료봉사단의 활동을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여러 병원이 긴급 의료구호활동을 펼쳤지만 모두 따로 움직였고 △의료물품 수송 △미국 비자 발급 △진료의 연속성에서도 다소 원활하지 못했다. 또 의료구호활동이 수도에만 집중되다 보니 포르토프랭스를 벗어난 지역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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