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反낙태 성지서 낙태 논하다

  • 입력 2009년 5월 19일 02시 55분


“화해 어렵지만 열린 마음으로 토론하자”

노터데임大 졸업 축사 통해 논쟁에 첫발

미국 사회에서 낙태, 동성애 결혼 등 도덕 및 가치관을 둘러싼 논쟁은 어떤 정치적 이슈보다도 휘발성이 강하다. 보수·진보 그룹 간의 공방이 워낙 날이 서고 감정적이어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논쟁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 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낙태 문제에 있어 여성의 선택권을 지지하는 전통적인 민주당 포지션을 유지해 왔지만 대선 때는 물론 취임한 뒤에도 최대한 말을 삼갔다. 그런 오바마 대통령이 17일 미국 내 대표적 가톨릭 대학으로 반낙태 성지로 불리는 인디애나 주의 노터데임대 졸업식 축사라는 형식을 빌려 낙태논쟁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생명의 시작을 언제부터로 보는가’ 등 논쟁의 콘텐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대신 논쟁의 하드웨어를 바꾸자고 호소하는 데 주력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어떤 수준에 이르면 양쪽 진영의 의견은 화해가 불가능한 게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공통점을 찾기 위해 이 문제를 토론할 때는 열린 가슴과 열린 마음, 공평무사한 용어들을 사용하자”고 촉구했다. 그는 “활력 있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활기찬 토론을 벌일 순 없을까. 각자가 자신의 원칙을 확고하게 지키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싸우면서도, 반대편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확신을 갖고 있는 상대방을 악마로 만들지 않을 순 없을까”라고 호소했다.

그는 “나 역시 2004년에 선거 운동 웹사이트에 ‘여성의 선택권을 빼앗아가려는 우파 이데올로그들’이란 표현을 썼다가 한 의사의 e메일을 받고 삭제했던 일이 있다”며 “낙태에 대한 내 생각이 변한 게 아니라 표현을 바꾼 것이다. 대화에서 예법을 갖추자”고 당부했다. 또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양심도 존중하자”며 의료진이 종교적 신조와 충돌하는 낙태 또는 기타 의료서비스의 제공을 거절할 수 있는 ‘양심 조항’의 입법화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날 축사는 수개월간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낙태 지지자를 초청해 연설 기회를 주고 명예박사 학위까지 수여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비판에 70명 이상의 주교가 동참했다. 이날 연설 시작 무렵에도 청중 속에서 “낙태는 살인이다” “아기 살해” “손에 피를 묻힌 자”라는 외침이 나왔다. 하지만 1만2000여 명의 청중 대부분은 ‘우’ 하는 야유로 시위자들을 침묵시켰고 대통령의 연설 내내 수차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일부 졸업생은 사각모에 낙태반대 심벌을 붙였고 교문 밖에선 수백 명이 시위를 벌이다가 30여 명이 체포됐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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