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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9월 2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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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의 지지 속에 학생과 일반 시민이 속속 가세하면서 미얀마의 반정부 시위는 1988년 이래 최고조에 이르렀다. 특히 유혈 사태 소식이 전해지면서 성난 민심이 들끓고 있다.
▽일촉즉발 상황=미얀마 군사평의회는 26일 오전 옛 수도인 양곤에 무장한 군 병력과 경찰을 투입해 시위대의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 최소 12대의 군용 트럭과 최루탄, 공포탄 등이 동원됐다.
AFP통신은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승려 1명이 군인에게서 무기를 빼앗으려다 총에 맞아 사망했고, 승려 2명은 곤봉에 맞아 숨졌다”고 보도했다. DPA통신은 승려 5명과 일반인 1명 등 6명이 숨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군경은 시위가 시작된 양곤의 불교 성지 ‘슈웨다곤 파고다’ 주변을 봉쇄하고 시위 참가자 200여 명을 체포했다. 시위대를 지지한 반정부 성향의 정치인 윈나잉 씨와 유명 연예인 자가나 씨도 잇따라 체포됐다.
하지만 1만 명의 시위대가 군부의 집회금지령과 야간통금 조치 등을 거부한 채 오후부터 가두시위를 재개하면서 긴장감이 높아졌다.
일반 시민들이 승려들의 행렬 양쪽에서 손을 잡고 ‘인간 방패’를 만들어 이들을 보호했다.
이번 시위는 정부가 지난달 15일 예고 없이 단행한 유가 보조금 철폐 조치가 도화선이 됐다.
보조금 철폐는 휘발유 값 폭등으로 이어졌고, 경제난 악화에 신음하던 시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군부의 언론 탄압과 인권 유린에 숨죽이고 있던 민심의 폭발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반정부 시위는 정부가 시위자 체포 등 단속에 나서면서 점차 잦아들다 이달 중순 승려들이 나서면서 다시 가열됐다. 24일에는 승려 3만5000명 등 1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해 1988년 민주화 시위 이후 최대 규모가 됐다. 1988년 8월 8일에 발생해 ‘8888 민중봉기’로 불리는 당시 시위도 정부의 불합리한 화폐 사용 금지로 인한 경제난이 도화선이었다.
12년째 가택연금 상태인 야당 민족민주연맹(NLD)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도 눈물로 이들에게 경의를 표시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일부 외신이 현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수치 여사가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다”고 보도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국제사회 “유혈진압 안 된다”=국제사회는 이날 미얀마 군부에 대한 비난과 함께 무력 진압 자제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일제히 쏟아 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5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미국인들은 버마(미얀마) 군사정부의 폭정에 분노한다”며 미얀마에 대한 경제 제재 및 독재정권 관련 인사들에 대한 비자 발급 불허 방침을 밝혔다.
유럽연합(EU)과 독일 등 각국 정부도 “평화적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군정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하겠다”고 경고했다. 특히 미얀마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내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불상사’가 없어야 한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지원 방안을 찾기 위해 미얀마의 반정부 인사들과 만나겠다는 뜻을 밝혔고, 데이비드 밀리번드 영국 외교장관은 “수치 여사가 미얀마를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놨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티베트의 종교지도자 달라이 라마, 국제사면위원회, 국제위기그룹(ICG) 등도 성명을 통해 미얀마 시위를 지지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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