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천광암]日, 교과서 내용 지우면 과거가 지워지나

  • 입력 2007년 4월 3일 03시 01분


일본 문부과학성이 지난달 30일 발표한 고교 교과서 검정 결과의 파문이 커지고 있다.

특히 ‘일본군이 오키나와(沖승)전에서 주민들에게 집단 자살을 명령했다’는 부분을 삭제하도록 하자 미국의 권위지 뉴욕타임스도 나서서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수많은 생존자가 참혹한 실상을 전하는 오키나와전 집단 자살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이다.

1945년 3월 미군이 상륙하자 자마미(座間味) 섬과 주변 섬 주민 수백 명이 수류탄 등으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열한 살이었던 미야기 쓰네히코(宮城恒彦·73) 씨는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시에 ‘미군과 영국군은 짐승이다. 붙잡히면 남자는 여덟 갈래로 찢기고 여자는 강간당한다’고 배웠다. (그런 분위기에서) 군이 섬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줬다. 자결은 사실상 명령이었다.”

전투에 방해가 되는 주민들을 일본군이 스파이로 몰아 살해한 일도 적지 않았다. 유아가 살해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문부성은 당시 일본군이 “집단 자살을 명령했다”는 증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명령을 하지 않았다”는 진술도 있다는 점을 들어 이 비극의 역사를 기록할 때 주어(主語)로 사용돼야 할 ‘일본군’이란 표현을 지우도록 했다.

일본 정부의 자료에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강제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논리를 빼박은 듯하다.

‘자학사관에 기초한 교과서를 총리관저 주도로 고치겠다’는, 아베 총리의 최측근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의원의 종전 발언을 떠올리면 두 논리가 일치하는 것은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일본이 새롭게 부상을 시도하면서 군국주의 역사를 희석시키려 한다는 아시아 국가의 의구심을 깊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옛 일본군의 비인도적 범죄를 지우는 데 혈안이 된 일본 정부의 행태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이웃나라 사람들뿐이 아니다.

전쟁 중에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나이가 지긋한 도쿄(東京)의 한 택시운전사는 지난달 31일 다음과 같이 말하며 몸서리를 쳤다.

“군국주의 소년으로 키워지던 그 시절의 악몽이 요즘 자꾸 떠올라 섬뜩하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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