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라배마 주, 기업 1심패소 31개 판결중 27개 뒤집혀

  • 입력 2007년 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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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게양대에서 국기를 내리다 다쳤다며 깃발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 장거리 비행 때 나타나는 신체 부작용(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에 대해 항공사의 책임을 묻는 소송, 대여 비디오의 연체료가 과다하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내는 집단소송…. 과거 언론 지면을 장식해 온 미국의 기획 민사소송은 천문학적인 배상금액에 따른 폭발적 관심만큼이나 “경박한 소송 남용”이라는 비판도 동시에 받아 왔다. 특히 집단소송의 경우 소송 당사자들의 피해 구제라는 본래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변호사들의 배만 불린다는 지적이 많았다. 예를 들어 과거 시리얼회사 ‘치리오스’의 제품 중독성을 문제 삼아 제기한 소송으로 담당 변호사들이 챙긴 수익은 200만 달러(시간당 2000달러). 반면 소송에 참여한 소비자들이 받은 것은 시리얼 한 상자를 얻을 수 있는 쿠폰이 전부였다.》

▽“쓸데없고 경박하다?”=미국의 ‘소송 개혁(tort reform)’은 이런 폐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여기에 기업들이 재력을 바탕으로 소송개혁 홍보 및 의회 로비 등을 통한 집단 대응에 나서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미 의회는 2004년부터 ‘소송남용제한법’과 ‘집단소송의 공정성을 위한 법’ 등 소송개혁과 관련된 법을 잇달아 통과시켰다. 주별로 위자료와 징벌적 손해배상 규모, 기업의 배상책임을 제한하는 움직임이 확산된 데 영향을 받은 것.

소송개혁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텍사스 주지사 시절에 추진했던 주요 과제이기도 하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지난해 말 연설에서 “붕괴된 소송제도는 미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이라며 사법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최근 미국 법원도 이런 흐름에 발을 맞추는 추세다. 일리노이 주 대법원의 경우 2005년 “순한 담배 광고가 소비자를 우롱한다”며 제기된 100억 달러 규모의 소송을 기업 보호를 이유로 기각했다. 1심에서 이겼던 판결이 항소심에서 깨지는 경우도 늘어 앨라배마 주에서는 2004∼2005년 원고가 승소했던 31개의 손해배상 판결 중 27개가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이런 소송 개혁 움직임에 변호사 업계에는 “이대로는 망할 판”이라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버몬트 주에서 법률회사를 운영하는 넬슨 로치 변호사는 “기존의 손해배상 사건에만 의존하다가는 파산하고 말 것”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최근의 기획소송은 GM과 포드 등 자동차업체를 상대로 지구 온난화의 책임을 묻는 사건 정도. 대신 변호사 수를 줄이거나 기업 자문, 특허소송 쪽으로 눈을 돌려 돌파구를 찾는 로펌이 늘고 있다.

▽기업의 힘=변화의 밑바탕에는 소송개혁을 외쳐온 각종 관련 단체들이 있다. 헤리티지재단, 맨해튼 인스티튜트, 미 기업연구소(AEI) 등이 지금까지 소송개혁 프로젝트에 투입한 돈은 수천억 달러로 추산된다. 미 상무부 산하 ‘사법개혁위원회’의 활동도 활발하다.

민간단체들은 필립모리스와 다우케미컬, 엑손모빌, GE 등 집단소송의 주요 타깃이 돼온 대기업들로부터 거액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미 소송개혁연합(ATRA)은 제약회사와 의료기관, 글로벌 기업 및 관계자 300명이 회원이다.

그러나 소송개혁이 몰고 올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배상금 규모를 제한하면 피해자가 제대로 구제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식물인간이 된 피해자에게 25만 달러로는 생계는커녕 치료비에도 어림없다는 것이 개혁 반대론자들의 주장.

이들은 또 “징벌적 배상 범위를 낮추면 힘없는 소비자 개개인이 기업의 불법행위를 견제할 수단이 사실상 사라진다”고 지적한다. 기업들이 비싼 변호사를 써서 재판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고, 항소절차를 남용하는 방법으로 교묘히 피해나갈 수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국에 미칠 영향=미국의 소송개혁이 당장 한국 법조계에 미칠 영향이 크지는 않다. 한국의 법률 관행이나 인식은 미국과 차이가 큰 데다 징벌적 손해배상 같은 제도도 없기 때문.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한 김행선 미국변호사는 “한국은 법원이 보수적이고 법률 규정도 까다로워 미국식 기획소송이 발붙일 여지가 아직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국내 법조인들은 정신적 손해배상의 범위가 오히려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커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법원이 인정하고 있는 사망 위자료는 5000만 원을 넘지 않는다. 미국이 상한선을 그은 25만 달러(약 2억3700만 원)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의 소송이나 사법개혁 방향이 미국법을 상당 부분 준용하는 추세라는 점에서 미국 소송의 변화는 눈여겨보아야 할 흐름으로 꼽힌다. 미국법을 참고해 만든 증권집단소송제의 경우 기업들의 문제 제기와 함께 시행 초기부터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을 검토한 사개추위의 보고서도 제출된 상태다.

사법연수원 1000명 시대를 맞아 변호사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소송 남발 및 소송의 질 저하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실제로 충북 충주에서는 한 변호사가 충주호의 안개 때문에 사과의 질이 떨어진다는 소송을 준비하다 중단한 사례도 있다. 기획소송 ‘사냥꾼’들의 과다 수임 경쟁이 소모적인 ‘미국 소송 따라하기’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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