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의 총에 빼앗긴 성실한 이민자의 꿈

  • 입력 2007년 1월 31일 17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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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내려고 그 고생을 했는지…."

이국땅에서 대낮에 느닷없는 강도의 총격에 아들을 잃은 노부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이 살던 동네도 슬픔에 잠겼다.

2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프린스조지 카운티 단독주택가의 작은 상가. 노란색 경찰 차단 테이프가 쳐져 있는 리쿼스토어(값싼 양주, 복권 등을 파는 소매점) 정문 앞에 추모의 꽃다발들이 놓여 있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도와 함께 가게를 보던 노승훈(32) 씨를 애도하며 흑인 주민들이 놓고 간 것들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착하고 열심히 사는 젊은이들을 본 적이 없다"며 눈시울을 훔쳤다.

노 씨는 27일 낮 3시반 경 가게에 침입한 복면강도 2명의 총에 맞아 숨졌다. 함께 있던 형 승렬(33)씨도 총에 맞아 중태지만 30일 현재 간단한 의사표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비는 넘긴 상태다.

워싱턴과 프린스조지 카운티를 합쳐 지난 주말에만 강도를 당해 숨진 사람이 6명에 이를 정도로 강력범죄가 빈발하지만, 승훈 씨의 죽음은 주민들에게 특히 큰 슬픔을 안겨줬다고 지역 언론은 전했다.

승훈 씨는 1989년 미국으로 건너온 노일룡(63)씨 부부의 세 아들 중 둘째. 노 씨 가족은 낯선 미국 땅에서 온갖 고생을 거쳐 5년전 이 가게를 인수했다. 중학교 때 미국에 온 승훈 씨는 버지니아공대를 졸업했고, 형 승렬 씨는 조지아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밟아온 엘리트들. 2년 전 아버지 노 씨가 심장수술을 받게 되자 이후 형제가 부모님 가게 일을 돕다 변을 당했다. 막내는 어머니가 가게 옆에 차린 델리가게 일을 돕고 있다. 형제들은 고된 학업에 지친 몸으로도 밤늦게 오는 손님을 위해 밤 11시까지 가게를 지켰고 때론 가게에서 숙식도 했다.

가난한 흑인이 대부분인 주민들 사이에서 이들은 정직하고 따뜻한 사람들로 소문나 있었다. 한국인 이민자들이 흑인 사회에서 인심을 잃는 경우가 적잖은데 노 씨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주민 모니커 하드그로브 씨는 "노 씨 형제는 언제 봐도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노 씨를 추모하기 위한 기금마련 운동에 나섰다.

장남 승렬 씨가 입원한 워싱턴 병원으로 찾아온 친지들 앞에서 노 씨 부부는 착하고 공부 잘하던 둘째 아들을 먼저 보낸 슬픔에 무너졌다. 말 못할 사연을 가슴에 담고 있는 이들은 30일 조문과 문병을 겸해 온 워싱턴 총영사관 직원들 앞에서도 설움에 복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프린스조지 카운티 경찰국의 다이안 리처드슨 대변인은 "동네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며 "2만5000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범인들을 추적 중"이라고 밝혔다. 폐쇄회로 TV 화면에 따르면 당시 가게엔 손님 2, 3명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강도 한 명이 총을 겨누고 현금을 넣다가 승훈 씨가 움직이자 망을 보던 다른 강도가 총을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아버지 노 씨는 가게 뒤에 잠깐 나가 있었고 옆 가게엔 어머니도 있던 상황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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